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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가는 이야기

옛 추억

by 머구리1 2021. 6. 17.

어제 함양군 홈페이지 어디에서 찾았다고 큰딸이 보내준 사진들인데

내 어렸을 적 추억들이 살아있었다.

 

 

금반초등학교 (1960~70년대)

내 모교다.

내가 68년부터 73년도까지 다녔고, 

처음에는 기성회비라고 몇십원을 냈다가 나중엔 육성회비로 이름이 바뀌면서 몇백원의

수업료를 내고 다니던 시절이다.

목조 건물로 비가 많이 오면 천장에 물이 새서 교실 바닥에 양동이를 받쳐두면

빗물로 인한 천장과 양동이의 소리가 음악이 된다.

저 건물에 4학년 이상의 고학년들이 수업을 했고

가운데 현관 왼쪽이 교무실이었다.

사진 왼쪽 안보이는 곳에는 신식 콘크리트 건물이 있어서

3학년까지의 저학년들이 수업을 들었다.

우리 마을에서는 지금은 4km 지만 예전엔 꼬불꼬불 산길이서 

대략 5~6km쯤 되는 먼길이었다.

길이 멀고 사람이 많아서 

내 한 학년 아래 부터는 마을에 월평분교가 생겨서

4학년까지는 분교에서 다니다가 5~6 학년은 본교인 이 학교로 다녔다.

그당시 한 학년이 80명 남짓이었고 두개 반으로 나뉘었었다.

지금은 전교생이 대략 20명 정도 되는 것 같다.

그것도 폐교될 위기에 처했는데 아토피 전문 학교로 바뀌어서

타지역에서 전학을 오는 바람에 유지가 된 것이다.

도담채라고 하여서 예전 저학년들이 사용하던 곳에 2층 건물을 올려서

학부모가 같이 살수 있게 만들었다.

 

마을 공동작업(1978년)

어느 마을 인지 확실히 모르겠는데 대략 양촌이나 목현쯤 되는 것 같다.

자세히 보니 목현 양조장 근처인 것 같기도 하다.

맞다면 지금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 비포장이긴 하지만

산청, 마천쪽으로 가는 버스가 다니던 길이다.

저 길은 90년 이후에 포장됐지 싶다.

예전에는 부역이라고 해서 마을 공동작업에 마을 사람들이 많이 동원되었다.

저분들이 이고 진 것을 다해도 굴삭기 한 삽도 안 될 텐데.....

저분들 중에 아직까지 살아있는 이가 있을까?

 

'애향단'이라고 해서 국민학생들도 조직이 되어서 아침에 마을 청소나

도랑을 치우기도 했다.

박통의 우상화가 한참이던 시절이어서

아침 등교길에는 맨 앞에서 애향단 깃발을 들고

시월유신 노래를 부르며 행진을 했다.

동요 산토끼에 아래 가사를 붙여서 불렀다.

"시월의 유신은 김유신과 같아서

 삼국통일 되듯이 남북통일 되어요."

2절은 기억이 안 나는데 마지막 구절은 "우리모두 다같이 박대통령 밀어요" 였다.

이 노래를 학교 운동장에서 전교생이 배우고 행진하면서 불렀다.

그때의 슬로건이 "천불 소득 백억 수출"이었다.

이것도 매일 주문처럼 외우고 낭독했다.

요즘 보면 미친 짓이겠지만

북한 사람들은 머리에 뿔이 달렸다고 생각하던 암울한 시절이니 뭐...

 

 

 

무제(1977년)

이 사진은 무엇 때문에 찍은 것인지 모르겠다.

산 중턱에 있는 집인데 많이 가난한 집 같다.

77년 도면 그래도 대부분 스레트로 지붕을 바꾼 시절인데

움막 같은 집에 사는 것을 보면 궁핍이 보인다.

인형처럼 보이는 빨간 옷을 입은 여인이 집주인인 것 같고

앞에 붉은 줄 무늬 옷이 딸인 것 같다.

처음에 인형인가 했다가 다른 사진을 보니 아니었다.

아마 면사무소에서 가정 방문을 한 것 같다.

박통 시절 마을 주택개량이라는 이름으로

초가집들을 빨리 스레트로 바꾸지 않으면

면서기놈이 와서 쇠스랑으로 지붕을 강제로 긁어 내렸다.

 

 

 

모내기(1978년)

여긴 그래도 면사무고 소재지여서 땅이 제법 넓다.

모내기가 아니라 못자리 만드는 작업 같다.

저 시절에는 뭐던 공동으로 작업을 많이 했다.

모자가 흑백이라 보이지는 않지만 아주머니들이 쓰고 있는 모자가 새마을 모자지 싶다.

고향 마을은 아니고 면사무소가 있는 목현쯤이지 싶다.

작은 농토에 저렇게 많은 사람이 투입되는데 무슨 경쟁력이 있었을까?

참 힘들었던 시절이다.

 

 

 

 

공동 못자리 만들기(1980)

우리 마을의 못자리 만들기다.

'월평 저수지' 위 '물방걸'이라고 부르는 곳으로 저곳은 아직도 비슷한 형태의 논으로 남아있다.

물론 논 합뺌이로 다랭이 수는 조금 줄었지만 땅은 그대로다.

대부분이 내가 아는 분들일텐데 사진이 흑백이어서 얼굴을 알수가 없다.

여기 아래쪽에 도랑이 있는데 징검다리여서 비가 많이 오면 애들은 건널수가 없어서

아버지가 업어서 건너 줘야 했고,

학교 마치고 올때는 아버지가 데리러 올때까지 기다려야 했던 곳이다.

사진 찍은 사람이 서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위치가 도로로

예전에 마을의 진입로쯤 되는 곳이다.

지금은 저 도로를 이용하지 않으니 진입로가 아니다.

사진 끝쪽이 지금은 우리 사과밭 올라가는 도로가 되었다.

 

 

태풍 셀마 피해(1987)

우리 지역에 많은 피해를 입혔던 태풍이 셀마였다.

고향마을은 인명피해가 없었지만 위 사진이 찍힌 목현 마을은 인명피해가 많았다.

밤에 비가 많이 온 바람에 꽤 많은 사람이 매몰되어 돌아가셨다.

위에 사진은 피해지역을 도지사가 위로 방문한 것이다.

수건 들고 있는 친구가 내 후배 같은데 기억이 없다.

가운데 곱설 머리 분이 도지사인 것 같다.

아래쪽 사진은 피해를 입은 집으로 동생 친구가 사는 집이었다.

저곳에서 두 분이 돌아가시고

내 친구 할머니도 돌아가셨다.

 

 

고향마을 진입로 완공(1991)

포장은 하지 않고 저 정도 해놓고 아래 사진들처럼 완공 기념식을 한 것 같다.

그당시에는 저 정도만 해도 좋은 길이었다.

칠십 몇년도 부터 버스가 하루 네번 다녔는데 저 길이 아닌 사진상에 보이는 물길 따라서 길이 있었다.

지금도 고향마을에 버스는 하루 네번이다.

결혼식을 88년도에 했는데 그때는 이 길이 없었고 저 아래쪽 길이 엉망이어서

함양읍에서 고향마을까지 2시간이 걸렸다.

(지금은 지안재로 가기 때문에 10 분 남짓이면 간다.)

진주에서부터 택시를 타고 왔는데 바닥이 낮은 진주 택시는 비포장 시골길을

차 바닥이 긁혀서 빨리 갈 수가 없었다.

그 당시 함양은 포장 안된 곳이 많아서 택시들의 바닥이 아주 높았다.

지금 보이는 물길은 저 아래쪽에 제방을 쌓아서 저수지가 됐다.

계곡 오른쪽 논들도 모두 저수지로 수몰됐다.

 

 

이장님인 친구 아버님이 감사패를 주고 있는데 누군지는 모르겠다.

사진에 나온 나이 많은 남자들이 대부분 한복인 것이 특이하다.

두장의 사진 속 남자분들은 대부분 돌아가셨고

여자분들 중 세분은 아직 살아계시지만 두 분은 요양원에 계신다.

아래쪽 사진 속에는 돌아가신 내 부모님도 두 분 다 계시고 당숙도 계신다.

 

참 아련한 기억의 사진들이고

배고픈 시절이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오래된 사진도 아니다.

30년에서 50년 정도 전의 사진들인데

지금의 세상과는 너무 다르다.

우린 

그만큼 

빨리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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