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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가는 이야기

大學

by 머구리1 2021. 6. 21.

 

중학교 시절

한 학년이 660명이었던 꽤 큰 중학교에서

제법 공부를 했던 내가 공고를 지원했을 때

담임 선생님은 나를 한참을 설득해야 했다.

'너 공고 가면 기름 뽀재기 밖에 안 된다.

차라리 집안 형편이 어려우면 인문계를 가서 사관학교를 가라"

내 사정을 세세히 모르는 담임 선생님은 몇 번을 설득했지만

가난은 사람을 빨리 포기하게 만드는지

아니면 빨리 철들게 만드는지

일찌감치 대학을 포기한 나는 내 생각대로 공고로 진학했다.

 

내 성적이 아까웠던 선생님은 인문계를 가서 사관학교를 가라고 조언했지만

사실 우리 집안에는 가난 말고도

선생님이 모르는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육이오 때 빨간 완장 차고 활동하신 덕분에 

사상범으로 무기징역 사신 당숙이 계셔서 사관학교는 꿈도 꾸지 못했다.

연좌제가 살아있던 박정희 정권 때여서

하다못해 공무원 하기도 힘든 시절이었다.

실제로 부사관에 지원해서 후반기 성적이 좋았던 나는 보안사에 차출이 된 적이 있었다.

내가 지원한 것도 아니고 차출이었다.

전대갈 장군이 제 스스로 진급해서 대장 계급장 달고 전역한 후

체육관에서 뽑힌 대통령을 하던 시절이니

보안사의 힘이 막강했고

보안사로 갔으면 내 인생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울산 보안사에서 1차 면접인지 뭔지를 받고 

서울에 있는 보안사교육사령부인가 하는 곳까지 가서 시험도 치고 했지만

결국은 신원조회에서 당숙의 전력이 문제가 돼서 떨어졌다.

그 당시 우리 집안은 공직 쪽으로는 대부분 포기를 하고 있던 시절이다.

하긴 그 당숙은 또 무슨 큰 죄가 있었을까?

뭘 알아서 좌익 활등을 했겠는가?

그냥 못 배운 죄로 그당시 멋져 보이는 인민군 따라 다니다가

전쟁이 끝나니 몽땅 뒤집어썼겠지.

그 당숙은 풀려나서도 계속 감시 속에 살았고

함양을 벗어나려면 파출소에 신고를 해야 할 정도의 자유가 저당잡힌 세월

그렇게 평탄하지 못한 삶을 살다 가셨다.

돌아보면 웃긴 일이다.

우리나라 보수 또는 우익이라는 사람들이 신처럼 떠받드는 박정희가

사실 최고의 친일파고 빨갱이라는 것이다.

일본군 장교로서 독립 운동가들을 죽이러 다녔고

빨갱이라고 부르던 남로당원이기도 한 박정희가 우익들의 정신적 지주라니...

그래서 더 빨갱이 타령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전과를 덮기 위해서 비슷한 신분들을 더 강경하게 탄압하는....

기실 친일파의 후손들이 만들었을 법한 '친일파'라는 말도 잘못된 말이다.

'친미'라는 말이 욕이 아니듯 '친일'이라는 말 자체도 욕은 아니다.

매국노 나 반역자가 맞을 것이다.

 

 

하여튼

중학교만 졸업하고 돈을 벌기를 바라셨던 아버지를 싸워 이긴 어머니 덕분에

인문계 대신 학비가 1/4 정도밖에 안하던

공립공업고등학교이긴 하지만 난 진주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을 하게 되었고

그 덕분에 내 두 해 후배였던 동생은 고등학교 진학을 못하게 되었다.

원래 나이대로라면 내가 졸업을 하고 동생이 입학을 해야 맞지만

동네 형따라 혼자서 초등학교를 한 해 빨리 입학 한 동생은 내가 3학년이 될때

고등학교를 입학해야 했다.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사춘기 사내에게 가난은 때로 부끄러운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급했다.

마음이 바빴던 난

학교에서 제일 먼저 실습을 나가서 육만 원씩 월급을 받을 수 있었고

군대 3년 버리는 게 아까워서 직업군인을 택하기도 했다.

난 부모님 도움을 안 받으면 되는 게 아니라

부모님을 도와야 하는 장남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삶에서

가난으로 인해 가보지 못한 대학은 많이 아쉬웠다.

어느 시기에는 내 꿈이 되기도 했다.

뚜렷이 무엇을 더 배우고 싶다기보다는 단순하게 대학 생활이 부러웠다.

아니면 대학 졸업장이 부러웠는지도 모르겠다.

 

딱 한번

그 꿈을 실행하려 한 적이 있었다.

처음 실습 나갔던 회사에서 1년이 지났을 때쯤

부산에 방위산업체가 있어서 면접을 보러 갔었다.

그곳에 다니면서 야간 대학을 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면접을 본 인사담당관은 계속 내일 다시 오라고 한다.

세 번인가를 내일 다시 오라고 하더니 마지막엔 인원이 찼단다.

결국 "내일 오라'는 얘기는

뇌물을 가져오라는 얘기였는데

세상 물정 모르는 나는 계속 내일만 믿었던 것이다.

 

그 뒤론 대학을 접었다.

정신적인 여유가 없기도 했지만 마음 자체가 그렇게 동하지도 않았다.

26년 전 이곳에 와서도 주변에 가끔 야간대학을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관심 밖이었다.

처음 몇년간은 너무 바빴고 

뒤에는 내가 지쳐있었다.

 

지금도 가끔 아쉬울 때가 있긴 하다.

그렇지만 후회를 한다거나 그렇지는 않다.

내 삶에 어느정도는 만족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쉽게 가는 대학이

나 같은 사람들에겐 이루지 못한 꿈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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