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 -김훈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안중근 의사의 이야기다.
아니 안중근 의사와 이토 히로부미의 이야기다.
책의 첫 장에 나오는 그림이다.
안중근과 이토의 이동경로를 통해서 서로의 대비를 시켜놨다.
서로의 이동경로를 따라가면서 안중근의 눈으로
이토의 눈으로
빌렘 신부와 뮈텔 신부의 눈으로 이야기를 해 나간다.
때로는 그의 부인 김 아려 아그네스의 눈으로도 이야기한다.
우리가 잘 몰랐던 우덕순의 이야기도 나온다.
거창한 혁명가의 입이 아니다.
그냥 조선인의 한 사람으로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려 나간다.
김훈 작가는 이 책을 쓰기 전에 일본을 오가면서 많은 사료에 대해 조사를 했단다.
1919년 일본은 고종을 폐위시키고 고종과 민비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 이 척(순종)을 황제에 올린다.
소설의 시작은 순종의 이복동생 이은(영친왕)이 일본으로 끌려가는 모습으로 시작된다.
이은을 데려가는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에서 메이지와 만나면서 압박을 받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조선의 대신들은 국권을 포기하는 문서에 직함을 쓰고 도장을 찍었다.
이로써 일본은 피 흘리지 않고 조선을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토는 조선 민초들의 폭발을 예상하지 못했다.'
황해도 진남포에서 출발하는 안중근과 일본에서 출발하는 이토가 하얼빈에서 만나기까지의 과정.
하얼빈은 이토에게나 안중근에게나 죽음을 향한 여행의 종착지다.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을 위한 외교협정을 체결하기 위해서 하얼빈으로 간 이토와
이토를 처단하기 위해서 하얼빈으로 가는 안중근의 기록이다.
'이토는 대신들을 겁박했고, 대신들은 황제를 몰아붙여 군대 해산의 윤허를 받아냈다.
...주둔군 사령관 하세가와는 맨손체조 훈련을 한다는 거짓으로 비무장 상태로 군인들을 모은 상태에서
무장한 일본군이 맨손의 한국 군인들을 에워싸고 해산을 통고했다.
황제(순종)는 군대를 해산 시킬 때 폭동에 대비라 하, 폭동을 진압할 일이 있으면 이토 통감에게
의지하고 부탁하라고 내각에 지시한다.'
'이토는 조선 사대부들의 자결이 아닌 무지렁이 백성들의 저항에 경악했다.
왕권이 무너지고 사대부들이 국권을 넘겼는데도, 조선의 면면촌촌에서 백성들이 일어섰다.
...수십 년 동안의 수탈과 억압으로 검불처럼 무기력해 보이던 조선의 백성들이 무너진 왕조의
부흥을 외치며 그토록 가열하게 봉기하는 사태가 이토는 두려웠다.
조선의 폭민들은 죽음에 죽음을 잇대면서 일어섰고 한 고을이 무너지면 이웃 마을이 또 일어섰다.
기생과 거지까지 대열에 합류했다.'
해산을 거부하는 군인들과 민간인을 일본군은 총으로 제압했으며 이 과정에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많은 이들이 죽었다.
이런 상황을 보고 안중근은 중국으로 갈 생각을 한다.
'청일 전쟁 당시 평양성에서의 조선 관리들은 청나라 편도 일본 편도 백성의 편도 아니었다.
평양 관리들은 평양성에서 청군과 일군이 전투를 시작하기 전부터 처자식들을 데리고
인근의 산속으로 들어갔다가 청나라 군대가 패해서 달아난 후에 평양성으로 돌아왔다.'
이토가 바라본 청일 전쟁 당시 조선 관리들의 행태다.
사형 선고를 받은 후 대련의 뤼순 감옥으로 이동하는 중에 하는 안중근의 이야기다.
'.. 이토의 나라는 대련을 쳐부수어서 차지했고 대련을 발판으로 하얼빈으로 진출했다
하얼빈역 플랫폼은 내가 이토를 쏘기에 알맞은 자리고, 이토가 죽기에 알맞은 자리다.
....나는 이토가 온 철도를 거슬러 가고 있다.
대련은 이토의 세상이다. 내가 말하기 편안한 자기로 내가 죽기에도 알맞은 자리다.'
1910년 2월 14일
안중근이 사형 선고를 받은 이날은
지금 우리나라에서 누가 초콜릿을 많이 받았나 자랑하는 밸런타인 데이다.
3월 25일에 사형 집행 예정이었으나 순종의 37세 되는 생일이어서 하루 뒤인
3월 26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런 대단한 마음을 먹고 실행을 한 그의 나이 겨우 서른둘이었고, 아내와 2남 1녀의 자식이 있었다.
그 나이에 그 조건에 어떻게 그런 대단한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나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일제가 조선인들의 동요를 우려해 그의 유해를 유족에게 돌려주지 않고 매장했기 때문에
그의 유해는 아직까지 찾지 못하고 있다.
책의 후기에 나와있는 내용으로 한국 천주교회는 공식적으로는 안중근 거사 이후 80년간
살인을 범한 죄인으로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1993년 8월 21일 김수환 추기경에 의해서 안중근 추모미사를 열수 있었고 김수환 추기경은
미사에서 '일제 치하의 당시 한국 교회를 대표하던 어른들이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대해
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그릇 괸 판단을 내린 것에 대해 연대적 책임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뮐레 신부는 프랑스 사람으로 타국을 침략하는 위치에 있는 나라의 사람이라
약소국의 입장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카톨릭을 조선에 선교할 수 있음에 하느님께 감사했다.
그런 그의 눈에 안중근은 살인자일 뿐이었다.
안중근 의사가 돌아가신지 백 년이 넘었다.
그의 바람대로 조선은 독립을 맞았지만 해방 후에는 조국으로 이장해 달라는 그의 유해는
아직도 못 이뤘다.
아직도 친일파들의 세상이다.
며칠 전 여당의 대표라는 작자가 일본은 단 한 번도 침략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임진왜란과 일제 치하는 어느 나라가 만든 것인가?
그의 조부는 일제강점기 면장을 한 친일파다.
그의 아비 역시 군사 독재 시절 경무과장, 내무부 차관, 경부 과장과 6번의 국회의원을 지낸 자다.
그래서일까 그는 친일청산법에 반대했었다.
조선의 해방을 가장 반대했던 친일파 놈들이 해방 후 그 열매는 모두 가져갔고
해방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서 아직까지 가난을 못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