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끄적끄적

그럴 때가 있다.

by 머구리1 2022. 10. 25.

그럴 때가 있다. -이정록 시집

두번째 읽은 이정록 시인의 시집이다.

지난번 시집인 '정말'보다 더 얇아서 두께가 0.7cm다.

'정말'은 0.9cm 였다.

책 표지도 화려하지 않고 수수하다.

이정록 시집의 특징인가 보다.

아니면 시인의 시처럼 이런저런 포장 다 걷어내고 실속만 채워서

많은 독자들에게 저렴하게 읽게 하려는 시인의 배려인지도 모르겠다.

시 감상이랄께 뭐 있을까.

이웃집 아저씨와 이야기 하는 듯한 느낌.

그러나 이해하기에는 조금 어려운 느낌.

뭐 그냥 그정도....

책 속의 시 몇편 옮겨본다.

그럴 때가 있다

매끄러운 길인데

핸들이 덜컹할 때가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누군가

눈물로 제 발등을 찍을 때다.

탁자에 놓인 소주잔이

지 혼자 떨릴 때가 있다.

총소리 잦아든 어딘가에서

오래도록 노을을 바라보던 젖은 눈망울이

어린 입술을 깨물며 가슴을 칠 때다.

그럴 때가 있다.​

한숨 주머니를 터트리려고

가슴을 치다가, 가만 돌주먹을 내려놓는다.

어딘가에서 사나흘 만에 젖을 빨다가

막 잠이 든 아기가 깨어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촛불이 깜박,

까만 심지를 보여주었다가

다시 살아날 때가 있다.

순간, 아득히 먼 곳에

불씨를 건네주고 온 거다.

진달래꽃

그럭저럭 사는 거지.

저 절벽 돌부처가

망치 소리를 다 쟁여두었다면

어찌 요리 곱게 웃을 수 있겠어.

그냥저냥 살다보면 저렇게

머리에 진달래꽃도 피겠지.

첨작

달밤에 지방을 태우고

엄니와 마루에 걸터앉아 뽕짝을 부른다

아버지도 없는 집에서 노래 불러도

된다니?

엄니는 스무살 색시로 돌아와 틀니를

고쳐 물고

하늘에서 무릎장단 소리 들려올 때,

찰칵!

엄니의 웃음은 언제나 천의무봉이다

내일보다는 오늘이 예쁘겠지?

골무처럼 작고 곶감처럼 속이 붉은 입술은

하늘의 반짇고리에서 나온 듯

아름다워서

구름 속 삼촌들도 '동백아가씨'를 따라 부른다

오랜만의 모인 아버지의 어린 목젖들,

동백꽃 봉오리에 술을 따른다

팔순

기사 양반, 잘 지내셨남?

무릎 수술한 사이에

버스가 많이 컸네.

북망산보다 높구먼.

한참 만이유.

올해 연세가 어찌 되셨대유?

여드름이 거뭇거뭇 잘 익은 걸 보니께

서른은 넘었쥬?

운전대 놓고 점집 차려야겠네.

민증은 집에 두고 왔는디

골다공증이라도 보여줄까?

안 봐도 다 알유.

눈감아드릴 테니께

오늘은 그냥 경로석에 앉어유.

성장판 수술했다맨서유.

등 뒤에 바짝

젊은 여자 앉히려는 수작이

꾼 중에서도 웃질이구먼.

오빠 후딱 달려.

인생 뭐있슈?

다 짝 찾는 일이죠.

달리다보면 금방 종점이유.

근디 내 나이 서른에

그짝이 지나치게 연상 아녀?

사타구니에 숨긴 민증 좀 까봐.

거시기 골다공증인가 보게.

그렇고 그려

육묘판에 씨앗을 심고 잎이 나오길 기다려봐.

떡잎이 가리키는 방향이 다 다르지.

그런데 이파리 무성해지고 키가 자라면 다 게서 거기여.

꽃도 두엇일 때는 동서남북 고개 수그린 놈 쳐든 놈 제각각이지만

무더기로 피면 그렇고 그려.

꼬투리도 열매도,

우리네 사는 것도 다 그렇고 그려.

좋은 것도 안 좋은 것도 하나둘일 때는

나만 응달 얼음판이고 억울하다만

살다보면 다들 걱정거리가

꾸러미로 바지게 짐짝으로 게서 거기여.

굶어 죽은 놈보다 많이 처먹어서 병 걸리는 놈이 많다잖여.

올챙이배처럼 창자가 복잡해도 똥구멍은 단순한 거여.

때 되면 죄다 땅속으로 겨울잠 자러 가는 거여.

슬픔도 괴로움도 다 무더기로 피는 꽃이여.

어우렁더우렁 꼴값하며 사는 거지.

굴러다니는 깡통도 다 개성적으로 빛나잖여.

그나저나 막걸리 잔은 누가 이렇게 찌그려놨대.

상처가 너나없이 참 억울하게 빛나는구먼.

 

종달새

엄니,

벌써 와서 죄송해요.

수업 중에 집에 오던 버릇,

아직도 못 고쳤구나.

하여튼 애썼다.

도망친 건 아니에요.

저도 이렇게 일찍 올 줄 몰랐어요.

근데 저만 몇겹이나

잔디 이불을 덮었네요.

뼈마디만 남아서

어미는 평토장도 무겁단다.

고단할 텐데 며칠 푹 쉬거라.

억하심정이야 말해 무엇하겠냐만

천천히 평생토록 얘길 나누자꾸나.

엄니도 좋은 꿈 꾸세요.

그런데 아버지는 왜

아무 말씀 안 하신데요?

녹아버린 애간장과

울화통이 또 터진 게지.

곧 뼈마디 추려서 일어나실 거다.

아버지가 칠성판을 발로 차도

죽은 척 누워 있거라.

꽃 필 때 보자.

아버지도 봄에는

종달새처럼 말이 많아진단다.

 

'끄적끄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1) 2022.11.17
연적 - 김호연  (2) 2022.10.27
아버지의 해방일지  (6) 2022.10.19
하얼빈  (2) 2022.10.14
가을이 갈라카네  (2) 2022.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