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동네 주변 마실을 다녀왔다.
그래봐야 걸어서 한시간 남짓 거리다.
삼봉산 민박 조금 못가서 보면 오른쪽으로 아래 간판이 보인다.
예전 이름으로 노쫑골로 부르다가 박통시절 행정편의화에 의해
한자표기가 가능한 놋점으로 바뀌었다.
지금은 타지에서 온 분이 저 뒤쪽 땅을 많이 사서 오토캠핑장으로
사용하고 있었고, 지금도 확장공사가 계속되고 있다.
계곡이 있는 것도 아니고 유명 관광지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손님이 없을 것 같은데 손님이 꽤 있단다.
아래쪽 소나무는 베지 않고 둔 것이 일부러 조경용 소나무를
심은것 처럼 멋지다.
뒤쪽에도 엄청많이 산을 밀어놨던데 다른 사업계획이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캠핑장 조금 위쪽에 있는 전원주택 단지다.
논과 산이었던 곳인데 여기도 누군가가 투자를 한 모양이다.
저 곳이 평당 40~60만원이라길래 어떤 미친 놈이 그 가격이 사냐고
헸는데 벌써 팔린 곳도 있단다.
내가 세상 물정을 모르는 건지 돈이 썩어 나는 사람이 많은지 모를일이다.
저게 40~60이면 내 땅은 도대체 얼마를 받아야 한다는 말인지 참.
여기도 아래쪽에서 보면 얼마 안 돼 보이는데 위에서 보니 엄청 넓다.
위에 밀어놓은 것을 보면 아파트 한 단지가 들어와도 될 것 같다.
하긴 돈 많은 사람들에게 몇억이 돈이겠는가.
없는셈 묻어놨다가 나중에 새끼쳐서 들어올지 모르지.
그래서 돈이 돈을 버는 세상이다.
조금 더 들어가 봤다.
산양을 키우고 있었다.
산양을 직접 본 것은 처음이지 싶은데 tv에서 보는 것 보다는
많이 크 보였다.
조금 더 들어가 봤다.
캠핑장 주인이 사는 집인 것 같다.
주변 말로는 저 곳에서 녹즙을 가공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근처 땅이 다 저분 땅이다.
저 곳에는 어린시절 과수원이 있었다.
과수원 주인은 지금 생각해봐도 이해가 안 가는 분이었다.
하루세끼 밥 먹기가 어렵던 60년대 저 집에는 카메라가 있었다.
서울 분이라고 했는데 저곳에서 과수원을 하면서 10년 이상을 사셨다.
중년의 부부와 청년이 아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특별히 경제활동을 하지는 않았는데 잘 살았다는 생각이다.
그당시 신문을 매일 받아봤다.
신문 배달은 과수원 아래집에 살던 내 초등학교 동기가 전담했다.
말이 신문이지 발행한지 일주일은 넘은 신문이다.
사람이 좋아서 동네 사람들 사진도 잘 찍어줬다.
우리집에도 몇장의 사진이 남아있다.
흑백 사진속에 부모님은 청년의 모습이다.
우스개 소리로 간첩 아닌가 하는 소리도 있었다.
과수원도 말이 과수원이지 복숭아만 조금 있었고
또 보리이삭 한포대 줏어가면 복숭아를 한 보따리 주셨다.
그러니 과수원으로 돈을 벌지는 못했을 것이다.
지금 그분을 뵈었으면 진심으로 고마웠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다시 도로로 나와서 조금 아래로 내려오면 마을 진입로가 보인다.
돌담이 아름다운 월평마을
돌담이 아름다운지는 모르겠으나 산속의 마을은 확실하다.
마을을 소개한 입간판도 보인다.
인구수가 50여 명이라고 되어 있는데 떨어져 있는 4개 마을을 다 합친 숫자다.
그림상에 나와있는 우리마을의 인구수는 20명 남짓이다.
입구에서 시간나면 막걸리 한잔도 괜찮다.
이 집도 본토박이는 아니고 들어온 분이다.
그 옆엔 지리산 문학관이 있다.
지리산 문학관은 원래 '금반초등학교 월평분교' 였다.
우리 마을에서 금반초등학교 까지가 예전에는 대략 5km정도로
멀다보니 어린 학생들이 다니기에는 힘들었다.
예전에는 마을에 애들이 많다보니 분교를 만들었다.
난 불행히도 이 곳에 못 다녔다.
내 한 학년 후배들이 이 학교 1회다.
학생수가 줄어들면서 다시 폐교가 됐다.
진입로에서 조금 들어오면 동생 원두막이 나온다.
동생이 지나가는 나그네들 쉬었다 가라고 원두막 아래에 평상까지 깔아뒀다.
조용히 쉬었다만 가시길...
쓰레기는 꼭 가져 가시길...
복숭아 몇 개 따 먹는 것은 좋으나 차에 실고 가지는 마시길...
부처같은 마음으로 원두막 설치해 둔 내 동생 마음 아 다치게...
원두막에서 1km정도 더 들어오면 우리 마을이다.
길은 대략 이런 길이다.
차가 마주치면 후진을 해서 넓은 곳으로 양보 해 줘야 한다.
특히 버스는 더 안 비켜주니 무조건 후진 하는 것이 좋다.
오늘길에 보니 연산홍이 잎을 틔운다.
봄이 올라면 좀 더 있어야 될낀대..
돌담이 아름다운 마을이 이런 담을 보고 하는 얘기는 아니겠지?
마을 안에도 별 돌담 없는데.
때 맞춰 버스가 들어왔다.
70몇년도 부터 하루 네번 들어오는 버스다.
오전 7시, 10시 오후 3시반. 7시반 에 들어온다.
읍에서는 아침 6시반, 9시반, 오후 3시, 7시에 출발한다.
오늘 처음 안 사실
당산나무가 없어졌다.
사진 가운데 볼록 한 곳에 원래 아름드리 당산나무가 있었다.
내 어릴적에도 아름드리였으니 내 증조할아버지 보다 오래 산 나무지 싶다.
매년 제주를 뽑아 설 앞날 자정에 마을 우물 세곳에서 목욕재개를 하고
설날 아침에는 저곳에서 제를 지냈었다.
작년에 마을 도로 확장하면서 베어버린 모양이다.
꼬장꼬장한 마을 노인네들이 어떻게 쉽게 승낙을 했는지 모르겠다.
하긴 이제 반대 목소리 낼만한 사람들은 이미 저 세상으로 떠났다.
마을 회관이 보이면 우리집도 다 왔다.
마을이 산속에 묻힌 것처럼 되어 있어서 겨울에도 따뜻하다.
겨울 하교길에도 마을에만 들어오면 따뜻했던 기억이 있다.
이제 많은 이들이 떠났고 그 빈자리를 또 다른 주인들이 채우고 있다.
나 또한 그중에 한 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