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결혼 이야기.
안녕 하세요.
얼마전에 제 딸아이(배다슬)를 통해서 제 이야기가 여성시대에 소개가 되었더군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닌데 딸애의 눈에는 아빠가 좋게 보였던 모양 입니다.
저의 결혼 이야기도 어쩌면 소재가 될지도 모르겠고 혹시 세상이 힘들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힘이 되었어면 좋을것 같아 글을 올려 봅니다.
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11월에 6촌 여동생이 선을 보라고 전화가 왔더군요.
그주 토요일 진주까지 올라가서 먼저 결혼한 친구에게 저녁 12시까지 맞선에 대해 교육을 받았습니다.
저는 맞선을 처음 보았거던요.
그렇게 저 스스로,완벽하게 맞선 준비를 했다고 생각하고,
맞선 장소인 진주 시외버스 터미널 앞,
소현 다방으로 가서 기다리고 있는데 . 조금 뒤 입구에서 마치 미스 코리아로 보이는 아가씨가
들어 오길래 내쪽은 아닐것이라고 딴생각을 하고 있는데 뒤에 6촌 여동생이 따라서 오더군요.
그때 부터 저는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앞날 친구에게 받은 교육의 내용이 하나도 생각이 안 나는 겁니다.
그래서 맞선이 끝나고 난 뒤에도 포기를 하고 있었는데, 몇일뒤 동생이 연락이 왔습니다.
"한번더 만나보고 마음이 있어면 서둘러라. 주변에서 자꾸 중매가 들어온다"
저는 "지금부터는 나의 능력이다"라고 생각을 하고 담당 반장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월차휴가를 10개를 냈습니다.
제 생각은 일단 열흘간 여자집 대문앞에서 버텨 보고 정 안 되면 혼자서 혼인 신고를 해버릴
계획 이었습니다.
그당시만 해도 남자 혼자서 혼인 신고가 가능 했거던요.
혼인 신고를 하고나면 진짜 나쁜놈이 아닌 다음에야 결혼을 승락 할것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만나기로 했던 큰 오빠가 갑자기 문제가 생겨서 약속장소에
못 오게 되는 바람에 범죄 행위는 하지를 못했습니다.
단지 진양호 카페에서 "진짜 아가씨가 마음에 든다... 후회하지 않도록 하겠으니 나와 결혼을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 부터는 제 식으로 진행을 했습니다.
다음주 만난 자리에서 여자집에서는 어떤 남자인지 얼굴이나 보자고 나왔는데
저희 집에서는 결혼 날짜를 잡아서 갔습니다.
그것도 2주후인 크리스마스로....
당황한 처남 두 분이서 저를 따로 보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모두 보내고 처남 두사람과 제가 맥주집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둘째 처남은 아예 대놓고 "솔직히 마음에 안 든다"고 하였고
큰 처남은 "일단 같은 H 그룹 사람이어서 인지 사람은 좋아 보인다"고 하더군요.
그래 놓고는 집에가서 "순아! 지금도 안 늦었다, 한번만 더 생각 해봐라"하고 했다더군요.
안 그렇겠습니다...
귀엽고 예쁜 3남 1녀의 막내 딸인데 송골매의 배철수씨 닮은 제가 마음에 들리가 있겠습니까?
아내쪽에 망설일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번갯불에 콩구워 먹듯이 급하게 추진 했지요...
그래서 담주에 예물하고...그 담주인 12월25일에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결혼 전까지 아내의 손도 한번 못잡아 봤습니다.
그당시 제 전재산 85만원과 집에서 얻어준 한칸짜리 방에서 그렇게 신혼을 준비 했습니다.
그런데 결혼 휴가를 낸 12월23일부터 노사 분규로 인해 직장 페쇄를 했습니다.
그로 부터 4개월간 실업자 신세..
그리고 해마다 반복되는 노사분규로 인해 일년에 3~4개월은 실업자가 되었습니다.
그당시 울산에 H중공업 노사분규 유명 했었지요..
그때는 아내도 참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도 한번도 제게 힘든 내색을 안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기회가 되어서 95년도에 창원에 있는 S그룹으로 가려고 아내에게 상의를
하였습니다.
지금도 아내에게 참 고마운게, 제게 "당신이 하는 일이라면 나는 무조건 믿고 따라간다
하고 싶은대로 해라"라고 하더군요.
같은 대기업이지만 기업 문화나 지역이 완전히 다른 곳으로 옮기는것에 대해 대분분의
여자들은 반대를 할건데도 아내는 저를 믿어 주었습니다.
그것도 애가 벌써 세명이나 되었고 막내는 돐도 안 되었거던요.
딸애의 편지에는 제가 잘 하는것 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아내가 훨씬 잘 합니다
제게 과분한 사람이고요..
아내는 농사철만 되면 차도 없이 다섯번씩 버스를 갈아 타면서 애들을 데리고
시골에 갔습니다.
제 부모님이 8년전에 1년 사이로 나란히 돌아 가셨습니다.
그때 제일 슬프게 운 사람이 제 아내였습니다.
살아 계실때도 부모님께서 제일 좋아 하셨고요..
아버님은 항상 맥주 몇병씩을 숨겨 놓았다가 저녁에 살짝 아내에게 전해 주었고
어머님도 항상 맛있는 것들을 챙겨 주셨습니다.
제 동생들도 제 아내를 제일 좋아 합니다.
그 덕분에 부모님이 돌아 가신지 8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형제간에 1년에 서너번정도는
시골집에서 모이고,,,명절때나 제사때 마다 잘 모입니다.
모두가 아내의 말없는 희생 덕분이지요...
가난한 집안 5남매의 장남에세 시집와서 고생고생 하면서 지금의 행복한 우리 가족을 만든
일등공신이 아내니까요..
저는 지금도 아내와 신혼여행 첫날밤에 한 약속을 지키기위해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부자로 살게는 못해줄지 모르지만 후회 하지는 않게 하겠다"
아내가 중간에 몇번 후회를 했는지는 물어 보지 않았으나 지금은 행복해 합니다.
저도 행복하고요.
저는 지금도 아내의 얼굴만 보면 웃음이 나고 좋습니다.
첫날밤 둘이서 약속한대로 결혼 10년차에는 신혼 여행을 갔던 제주도를 다시한번 갔었고..
20년 차에는 제 수준에서 최대한 고급스럽게 해외 여행도 다녀 왔습니다.
앞으로도 아내와 최대한 즐겁게 살려고 합니다.
제가 제 주변에 젊은 사람들이 결혼을 할때면 꼭 불러서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내나 남편을 내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살아라" 입니다.
"내것이라고 생각을 버리면 부부 싸움의 반은 줄일수 있을것 같고..
상대의 단점보다는 장점을 찾게 될것이라고 합니다.".
"아울러 싸우더라도 하루를 넘기지 말고 각 방을 쓰지 말아라"고도 합니다.
"그것만 잘 지키면 50대에도 집에 빨리 가고 싶을 것이라고 ....
이제 다음주면 또 어머님 기일 이네요.
이번 기일에는 제사후에 아내와 둘이서 시골에 부모님 산소에나 다녀 와야 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아래는 제가 아내의 생일에 보낸 카드 입니다.
강석우 선생님의 목소리로 한번 아내에세 들려주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우리의 생이
딱 절반 이었어면 좋겠다.
지금까지 만들어온
우리의 사랑이
딱 절반 이었어면 좋겠다.
지금까지 이루어온
우리의 것들이
딱 절반 이었어면 좋겠다.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온 것들이
딱 절반 이었어면 좋겠다.
지금까지 내가 당신에게
해준 것들이
딱 절반이었어면 좋겠다.
그 남은 절반을
지금부터
내가
채워줄수
있었어면
좋
겠
다
당신 생일날
아침에
신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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