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창진 신부님의 책이다.
황창진 신부님은 일반인들에게 많이 익숙한 분이다.
TV로 유튜브로 많이 알려져서 신부님이라기보다 방송인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당연히 본업은 신부님이고
기본적인 지위는 천주교 수원교구 기산성당 주임신부님이시다.
TV 프로그램에서 스님, 목사님과 함께 사람들의 고민도 들어주고
또 유튜브에서는 절집을 찾아다니며 스님들과 교류도 한다.
'괴짜신부', '날라리 신부'라고도 불리지만 내겐
친구 같은 신부로 친근감이 있는 신부님이다.
개그맨 옥동자를 닮은 재미있는 신부님이기도 하다.
물론 직접 본적은 없이 유튜브를 통해서만 봤다.
일반적으로 개신교들이 타 종교에 대해서 인정하지 못하는 수준을 넘어서
적대시하는 것에 비추어 보면 신부님의 타 종교에 대한 존중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여러 가지 프로그램 중 성진 스님과 함께하는
'님과 함께'라는 프로그램을 제일 재미있게 봤다.
성진 스님과의 합이 제일 잘맞는 것 같다.
책의 내용은 대부분 알고 있는 내용이고
실천하려 하지만 잘 되지 않는 것들이다.
획기적인 새로운 아이디어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이렇게 저렇게 살면 편안할 것이다 는 내용이다.
지금 내가 고생하고 있는 상황과도 많이 맞아서 재미있게 잘 읽었다.
한 번에 읽고 책장에 꽂아 두기엔 아까워서
화장실에 두고 수시로 읽으면 도움이 될 것 같다.
이재익 SBS PD의 추천사 중 한 토막에서 황창진 신부에 대한 제일 적절한 표현을 봤다.
종교인의 권위란 스스로 내려놓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굳이 다시 쥐어줄 때 비로소 힘을 발휘한다.
머리말을 먼저 옮긴다.
불행해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 타인,
세상을 어떻게든 극복하려는 생각에서 못 헤어나고 있어서
늘 주변 사람들에 대해 분노했고 불공정한 세상을 받아들이지 못하며
문제가 생길 때마다 세상 탓 남 탓을 하니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반대로 현실과 상관없이 즐겁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상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끗이 인정했다.
"할 수 없지 뭐. 어쩌겠어?" 라며 오늘 사는데만 충실했고,
무엇보다 그들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일만 집중하고
깜냥 밖의 일은 과감히 무시했다.
부조리한 세상에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불행을 자초하는 길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은 내 뜻대로 돌아가지 않으니까.
반면 그런 세상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할지 결정하는 내 마음만큼은 얼마든지 다스릴 수 있다.
조선시대 천주교 박해로 인해 사형당하는 신자들은
오지 않은 내일을 바라보는 대신 처음이자 유일한 오늘 하루.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충실히 사는 것
그것이 끔찍한 공포에 함몰되지 않고 신념을 지켜낼 수 있었다.
나의 현실과 많이 닮아 있다.
불공평한 세상에 대한 불만으로 속이 터지고
남 탓 세상탓으로 마음이 더 아프다.
신부님 말대로 부조리한 세상에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잘못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맘이 편치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냥 무시하고 살면 편하긴 하겠지만
그게 또 쉽지가 않다.
하나 둘 내려놓는 연습을 매일 해야 한다.
내 인생에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근거 없이 내게 상처를 준다면 내가 안 받으면 그만이다.
소중한 나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더 많이 사랑하기 위해,
상대의 잘못은 상대의 몫으로 그냥 남겨둘 필요가 있다.
나 또한 사람들의 평가에 신경을 쓰이고
남들에게 좋은 사람 소리를 듣기 위해 애쓴다.
사실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내게 관심이 없더라는 것도 알고
내가 어떻게 하든 상관없이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싫어한다.
남의 눈에 신경이 쓰여서
사실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관심이 있는 척 의리기 있는 척을 한다.
내가 받으려는 생각이 없으면 안 하면 된다.
결국 내가 받으려는 욕심에 서운함이 생기는 것이다.
진실로 젊고 건강하게 살기 바란다면 몸 생각하기에 앞서 마음을 챙겨야 한다.
사람의 마음은 꿈과 재미를 먹고 자란다.
때로 그것이 육체의 안위를 거스를지라도 마음이 웃을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걱정으로 잠이 오지 않는다면 스스로에게 물어라.
'이 걱정이 실제 벌어진 문제 때문인가. 아니면 내가 만든 예측인가?'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걱정은 정당한 근거가 있어서가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 생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만 그런 게 아니라 인간이라면 다 그렇다.
요즘 내가 힘든 부분이다.
일어나지 않은 일 때문에 밤잠을 설친다.
어쩌면 육체적인 건강과도 상관이 있을 것이다.
인간이 하는 걱정 대부분이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교육과 책을 통해서 배웠다.
그런데도 일어나지 않은 일의 걱정 때문에 잠을 못 자고
속 울렁거림이 생긴다.
마음의 근심은 육체까지 좀 먹어서
결국은 몸과 마음이 같이 지칠 것이다.
하루빨리 돌아가야 한다.
돈이 많아도 갈증을 느끼면 가난하고
돈이 없어도 여유를 가지면 부자다.
돈은 좋은 것이다.
돈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속물적인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기 성숙을 이룬 사람의 당당함이다.
하지만 돈을 신격화하면 그때부터 불행한 인생, 망한 인생이 시작된다.
나이가 들수록 꼭 갖춰야 할 삶의 기술은 '바르게 자신의 참모습을 아는 것'이다
나이 든 자신을 똑바로 마주하면서 젊음에 대한 미련, 지위에 대한 집착. 쓸데없는 권위의식 등
불필요한 노욕의 잔가지들을 쳐내야 한다.
속이 빈 고목에 작은 들짐승과 곤충이 찾아들 듯 노욕을 비워 품이 넓은 사람 곁에는
자연스럽게 사람이 모이게 마련이다.
-어차피 백 년을 살아야 한다면 -
많은 에세이들이 돈에 대해서 무시하라고 하는데
이 책은 돈에 대해서 소중한 것이고 행복의 필수 요소라고 이야기한다.
맞는 말이다.
돈이 많아야 행복한 것은 아니지만
돈이 없이 행복할 수는 없는 세상이다.
대신 돈에 목숨을 걸지는 말자.
사실 돈으로 사는 행복은 끝이 없다.
서울에 사는 친구는 내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부자다.
몇백억의 재산을 가지고 있고
튼튼한 회사도 가지고 있다.
그 친구도 강남의 부자들과 골프를 칠 때나 여행을 가면
움츠려 든다고 한다.
난 이미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한다.
아쉬움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경제적으로 그래도 나보다 못 한 사람이 더 많다고 생각하고 만족한다.
기호는 언제든 바뀔 수 있지만 가치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바뀌지 않는 가치문제를 두고 감정을 실어 대응하는 것은
내 안에 화를 심겠다는 선언과 다르지 않다.
신념이 다른 누군가와 계속 부딪힌다면, 괴로운 것은 결국 나다.
잠 못 드는 것도 나고, 울화가 터지는 것도 나다.
답 없는 문제에 매달려 스트레스를 받거나 고민할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감정이 태도가 되지 않게 해야 한다.
-종교와 정치문제에 대해-
내가 제일 어려운 부분이다.
종교고 정치고 관심을 끊어야 내가 편한데 그렇지를 못한다.
종교인 같지 않은 종교인들의 행동
쓰레기 같은 성직자라는 사람들의 행동에
열 받고 속에서 불이 난다.
내가 어쩔 수 없으니 포기하라고 하는데
내가 어쩔 수 없으니 화가나는 것이다.
내가 어쩔수 있다면 화가 날 이유도 없다.
내 맘대로 해버리면 되니까.
내 신념 하고도 연계가 되는 부분이다.
국민이 정치에서 관심을 끌 때 정치인들은 더 썩어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싫다고 썩었다고 눈을 돌리면
그들은 더 좋아서 맘껏 해 먹을 것이다.
그래서 관심을 꺼지도 못한다.
나만 옳은 것도 아니고
그들이 다 썩은 것도 아닌것을 알면서도
마음 비우는 게 어렵다.
죽음을 천 번 두려워하면 천 번 죽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은 딱 한 번 죽는다.
세상에서 가장 정확한 진실은 '태어나면 죽는다'는 것이다.
걱정한다고 달라질 게 없는 불변의 진실을 두고, 왜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쳐가며
죽음의 드라마를 쓰는가?
-죽음에 관해서-
난 특이하게도 예전부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그렇게 많이 없다.
단지 고통스럽게 죽을까 봐 겁이 난다.
죽는다는 것에 대해서 비관적이지도 않고 비켜가고 싶은 생각도 없다.
신이 한 일 중에서 제일 잘 한일이 누구나 한 번은 죽게 만든 것이 아닐까?
어떤 권력자도, 어떤 재산가도 한번은 죽는다.
그런데도 욕심은 끝이 없다.
어차피 죽을 때는 빈손으로 갈 건데.
사실 죽는 것보다 더 겁나는 것은
노년의 외로움과 노년의 병든 육체가 아닐까 한다.
늙어서 몹쓸 병이 들거나 주변에 아무도 없이 혼자 살 때
그 외로움이 더 무섭다.
행여 치매나 뇌졸중이 더 무섭다.
사전 연명치료 의향서를 신청하긴 했지만 몹쓸 병은 무섭다.
나이가 들수록 죽는 복이 중요하다고 느낀다.
우리는 이미 천국에 있으면서 이를 느끼지 못하고 살아간다.
자청해서 지옥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순간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오늘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내일 갑자기 행복할 수 없듯
지금 천국 안에 살지 않으면 죽어서도 천국에 살지 못한다.
천국과 지옥은 결국 내 마음 안에 있은 것이다.
죽어서 천국 갈 생각으로 종교활동을 하고 있다면
과연 제대로 된 종교인가를 진지하게 돌이켜봐야 한다.
믿음 천국 불신지옥이라고 떠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가 믿는 신은 그렇게 속 좁은 양반이 아니다.
세례를 받든 안 받든 당신들 앞에 충성을 맹세하든 안 하든,
절대자가 그런 걸 따지겠는가?
이런 문제로 천국에 가네 지옥에 가네 따지는 건 결국
내가 믿는 신을 내 눈높이로 끌어내리는 것이다.
-사후 세계에 관하여-
신부님은 사후세계에 대해서
"있다고 믿으면 있을 것이고, 없다고 생각하면 없을 것이다"라고 한다.
정말 맞는 말이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지하철역이나 사람많은 곳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리라는 팻말을 들고
길거리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너무 무시하는 짓이다.
그들의 신은 그렇게 속이 좁을까?
자신을 믿지 않았다고
자신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죽은 이들을
지옥으로 보낼까?
하느님의 속이 그 정도로 좁지는 않을 것 같다.
신이 아닌 나도
나를 모르고 죽은 조선시대 사람들은 용서를 할 것 같다.
"죽어서 천국 가려하지 말고
살아서 천국처럼 살자"는 내 생활신조다.
최대한 즐겁고 보람차게 살자는 것이다.
죽어서 복 받으려고 지금 고통스럽게 살지 말자.
남녀 간의 사랑에는 단계가 있다.
사랑에 푹 빠지는 단계를 '뛰는 사랑'이라고 한다면 그다음 단계는 한 곳을 바라보는 '걷는 사랑'
마지막 완성 단계가 편히 쉬면서 힘이 돼주는 '머무는 사랑'이다.
이를 거부하고 가금 뛰는 사랑만 고집하면 그 사랑은 집착으로 변질되게 된다.
언젠가 우연히 만나는 행복은 없다.
행복은 미래에 있지 않고 살아 숨 쉬는 현재에 있다.
현재 행복하지 않으면 미래에도 행복할 수 없다.
현재의 행복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은 힘들고 어려운 문제를 만났다고 해도 쉽게 털어버린다.
고통 속에 사느라, 다시 오지 않을 오늘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재미와 즐거움을 좇아 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혹시 나이가 들어서도 뛰는 사랑만 고집하지 않았는지 반성해본다.
이제 서로의 힘이 되어주는 머무는 사랑을 할 때인데
아직까지 뛰는 사랑을 좇은 것은 아닌지
같이 걷는 사랑만 고집한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반성해 본다.
살면서 느끼는 대부분의 분노는 만족할 줄 모르는 욕심에서 비롯된다.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상대가 내 뜻대로 따라주지 않아서
남 탓 세상 탓을 하면 화를 낸다.
내가 가진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고 나면 화낼 일이 하나도 없다.
그것이 행복으로 가는 첫걸음이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가 크다면, 뜻한 바를 이뤘는데도 마음이 불안하다면,
잠시라도 혼자 있는 시간을 가져보라.
아무것도 하려 들지 말고 숨 한번 크게 내쉬며 눈을 감아보라.
그런 시간이 계속될수록 나를 힘들게 한 많은 문제들이
나도 모르는 새 풀려 나가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요즘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혼자만의 시간이 아닐까 한다.
내 사정을 일일이 누구에게 말하지도 못하는 것이고
그냥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서서히 혼자 사는 연습도 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