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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가는 이야기

벚꽃

by 머구리1 2022. 3. 29.

오늘 아침 출근길에 보니 동쪽 하늘에 잘려진 손톱 같은 새벽달이 외롭게 떠 있는 걸 보니

음력 한 달이 다 지나가는 것 같다.

 

회사에 있는 벚나무도 만개를 했다.

저 사진은 최근 5년간 매년 찍은 듯하다.

올해는 날씨가 따뜻해서인지 벚꽃의 개화가 조금 빠르다.

창원 대로변에도 만개를 했고, 조금 일찍 핀 녀석들은 벌써 지고 있다.

예전 같으면 이번 주말에 군항제를 할 시기다.

올해도 코로나 때문에 군항제는 열지 않는다.

장사꾼들 입장에서야 불만이겠지만 진해나 창원 시민들은 좋아한다.

차 안 막히고, 사람이 덜하니 꽃구경 하기는 더 좋다.

지금은 진해 아니어도 벚꽃 구경할 곳은 많다.

경주, 합천,하동, 여의도, 등등..

이름이 알려진 곳만 그렇고 각 군지역까지 하면 훨씬 더 많다.

 

사실 난 이게 좋게 보이지 않는다.

꽃이 무슨 죄가 있고 또 아무 꽃이면 어떠랴마는

우리나라 국화라는 무궁화 축제를 하는 곳은 없는데(있긴 하겠지만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제일 싫어한다는 일본 국화인 벚꽃 축제는 우리나라 여기저기에 천지다.

내 고향의  면단위 어디서도 한다.

 

아마 박통의 영향이지 싶다.

사실 우리나라 최고의 친일파는 박통이 아닐까 한다.

일본 육군사관학교(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 일본군 장교로 근무하면서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들인 사람이다.

일왕에게 충성혈서까지 썼으며 존경하는 인물이 '이토 히로부미'일 정도로 철저한 친일파였다.

시절이 그러했다고 하기에는 그 뒤의 행동들도 너무 아니다.

 

 

청와대 시절 그의 취미가 일본군 군복을 입고 말을 타는 것이었다니 그의 일본 사랑은 대단했던 듯싶다.

위에 사진도 청와대 사진이다.

1961년 5.16구테타 후  대한민국 최고희의 의장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에는

만주군관학교 교장이었던 '나구모신이치로'를 만나서 '선생님의 지도와 추천 덕분으로 육군사관학교를 나와서

여기까지 올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한 뒤 큰절을 하고 술을 따랐다고 한다.

이 장면이 일본 국영 NHK TV에 방송되었으니 일본 우익들이 얼마나 우쭐했을까?

답례로 나구모신이치로는

"다카키 마사오 생도는 태생은 조선인지 몰라도 천황에 대한 충성심은 일본인보다 훨씬 더

 일본인 다웠다"고 얘기했단다.

나라의 최 고위 지도자가 자신의 나라를 침략했던 제국주의 국가에 가서 한 행동이니

지금 봐도 참 부끄러운 일이다.

 

그의 일본에 대한 동경은 그 시절로 끝이 안 나고 계속해서 이어졌던 것 같다.

71년 10월 강창성 보안 사령관이 청와대를 찾아갔을 때

'박정희는 일본군 장교 복장을 하고 가죽장화에 말채찍을 들고 있었으며

박정희는 가끔 이런 복장을 하고 말을 타고 즐기면서 만주군관학교 시절을 회상했다"고 한다.

우익 신문이라는 중앙일보 91년도 기사라니 믿어도 될 것 같다.

또 박정희는 술에 취하면 일본 군복을 입고 일본 군가를 즐겨 부르며

일본 왕의 '교육헌장'을 줄줄이 암송하기도 했단다.

그는 중앙정보부의 마지막 궁정동 만찬에서도 일본 노래를 부른 것을 봐서는

죽을 때까지 철저한 친일파였다.

사람 모인 자리에서는 일본군 시절 암기사항을 줄줄이 암송하고

일본 군가나 가요를 즐겨 불렀다니 그는 해방을 바라지 않았던 건 아닐까?

당연히 그의 입장에서는 해방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독립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겠지만 제일 절실하게 반대했을지도 모른다.

독립이 되지 않았어도 그는 큰 권력을 쥐었을 것이다.

독립 후에는 또 남로당에 가입을 했고,

미국과 이승만이 남로당을 없애려 하자 후다닥 배신을 땡기고 자신의 동료들을 밀고했으니

어쩌면 아주 약삭빠른 기회주의 자이기도 하다.

독립 전 일본군 장교 다카키 마사오였던 그는 독립 후 박정희로 변신, 우리나라 대통령이 되었으며

그의 딸까지 대통령을 해 먹었으니 성공한 인생이긴 하다.

 

그의 업적이라고 하는 경제성장도 사실을 알고 보면 그가 했다기보다

미국이 멱살 잡고 끌고 갔다고 봐야 한다.

그는 사실 처음에는 미국 말을 안 듣고 지맘대로 하다가 말아먹고

미국에서 원조 끊는다는 협박에 할 수 없이 미국이 시키는 대로 해서 

경제성장이 된 것이다.

 

박정희가 정권을 잡고 79년까지 무소불위의 힘을 휘둘렀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야 다 그 밥에 그 나물이었을 것이니

이 땅에 벚나무가 여기저기 널린 것도 이해가 된다.

아마 우리나라 삼천리에 벚꽃을 퍼뜨리고 싶었을 것이다.

계속해서 일본의 식민지로 남아있길 원했지 싶다.

그 계획은 일단 성공한 듯 보인다.

지금도 친일파의 세상이니 그가 원하는 대로 된 것 같다.

벚나무라는 게 성장이 빠르고 또 옮겨 심어도 잘 산다.

물만 잘 주면 웬만이 척박한 땅에서도 잘 산다.

 

군 시절에는 저 벚꽃이 웬수였다.

벚꽃이 필 때는 화려한데 꽃이 질 때는 그렇게 추할 수가 없다.

더해서 비까지 내려버리면 빗자루질 하기가 정말 어렵다.

해군종합기술학교에서 해군사관학교까지의 길에 벚꽃이 정말 화려하다.

그 벚꽃이 지기 시작하면 매일 아침 빗자루질을 해야 했었다.

 

꽃이 무슨 죄가 있겠나만은 

여기저기 벚꽃축제가 뉴스에 나오기 시작하면 별로 좋아 보이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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