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살아 가는 이야기

다 다르다

by 머구리1 2022. 4. 14.

다 다르다

 

초등학교 일 학년 산수 시간에
선생님은 키가 작아 앞자리에 앉은
나를 꼭 찝어 물으셨다

일 더하기 일은 몇이냐?
일 더하기 일은 하나지라!
나도 모르게 대답이 튀어나왔다

뭣이여? 일 더하기 일이 둘이지 하나여?
선생의 고성에 나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예, 제가요, 아까 학교 옴시롱 본깨요
토란 이파리에 물방울이 또르르르 굴러서요
하나의 물방울이 되던디라, 나가 봤당깨요

선생님요, 일 더하기 일은요 셋이지라
우리 누나가 시집가서 집에 왔는디라
딸을 나서 누님네가 셋이 되었는디요

아이들이 깔깔깔 웃기 시작했다
나는 처음으로 손바닥에 불이 나게 맞았다

수업시간이 끝나자마자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내 손바닥을 어루만졌다
어쩌까이, 많이 아프제이, 선생님이 진짜 웃긴다이
일 더하기 일이 왜 둘뿐이라는 거제?
일곱인디, 우리 개가 새끼를 다섯 마리 낳았응께
나가 분명히 봐부렀는디
쇠죽 끓이면서 장작 한 개 두 개 넣어봐
재가 돼서 없어징께 영도 되는 거제

그날 이후, 나는 산수가 딱 싫어졌다

모든 아이들과 사람들이 한 줄 숫자로 세워져
글로벌 카스트의 바코드가 이마에 새겨지는 시대에
나는 단호히 돌아서서 말하리라

삶은 숫자가 아니라고
행복은 다 다르다고
사람은 다 달라서 존엄하다고.

 

어제 아침 화장실에서 읽은 박노해 시집에 나오는 시 한 편이다.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항변 같다.

 

나 또한 비슷한 기억이 있다.

 

중학교 3학년 때

자칭 '조 도사'라는 별명을 만들어서는 그렇게 부르라던 

물상인지 생물담당 선생이었던 조한* 선생이

갑자기 수업하기가 싫었는지 무엇이든지 물어보라고 한다.

뜬금없이 난 왜 갑자기 그게 궁금했을까?

내가 질문을 했다.

"선생님 태양이 멀리 있습니까? 하늘이 멀리 있습니까?"

그 당시 난 하늘을 대기권이라고 생각했었고

대기권인 하늘보다 안쪽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해와 달이 이해가 안 갔었다.

친절하신 선생님은 쌍욕과 함께 양쪽 볼이 터지도록 싸대기를 날렸다.

왜 맞는지도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지금도 난 왜 맞았는지 모르고

지금도 하늘이 먼지, 태양이 먼지 모른다.

선생님이 하는 일에 감히 토를 달 수 없던 시절이니 선생이 패면 맞아야 했다.

중학교 때까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목은 수학과 과학이었지만

저 사건 이후로 저 과목이 싫어졌다.

 

또 한 번의 안 좋은 기억도 같은 교실이다.

예전에는 혼분식을 하라고 점심시간에 도시락 검사를 자주 했다.

하지만 워낙 깡촌이라 중학교 때부터 자취를 했던 난 보리쌀이 없었다.

보리쌀을 넣어서 밥을 하려면 보리쌀을 미리 삶아서 보관해 두어야 하는데

중학생인 나나 동생이 그것을 할 줄 모르니 부모님께서는

보리쌀을 아예 주지를 않았다.

점심시간에 도시락 검사를 나온 선생은 하얀 쌀밥인 내 도시락을 보고

밥 먹는 놈을 불러 세워서는 개 패듯이 팼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지?

그 선생은 담임이었으니 내가 자취하는 것을 알았다.

 

 

국민학교 시절에도 폭력교사는 있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교사들이 더 많았겠지만.

어느 학교에서나 호랑이 선생님이라고 불리던 폭력교사는 있었다.

어린이용 TV 드라마 제목으로까지 나왔지만

듣기 좋게 부르던 호랑이 선생님은 사실 폭력교사였다.

애들을 잘 패는 선생을 대부분 호랑이 선생님으로 불렀다.

 

군인도 아닌 국민학교 4학년 그 어린애들을

명태말리기(다리를 벽에 올리고 거꾸로 손을 땅에 짚는 자세)를

시켜놓고 몽둥이로 엉덩이를 패던 곽 씨 성을 가진 교사.

여자애들까지 그렇게 패던 그 선생은 혹시 소아 성도착증 환자가 아니었을까?

60~70년대 국민학생들은 지금의 초등학생보다 덩치가 아주 작았다.

뺨을 맞는 것은 예사였다.

뺨을 맞으면 영화 '친구'에 나오듯이 애들이 픽픽 날려서 쓰러졌다.

 

부끄러움 때문에 남 앞에 서는 것을 잘 못하는 친구를 교단 앞으로 불러내서는

노래를 할 때까지 계속 패던 3 학년 때 담임선생.

치마 입은 여자애들까지 운동장에 원산폭격을 시키던

내 아버지와 비슷한 나이의 선생.

돈이 없어서 미술 준비(도화지와 크레용)를 못한 애를

뺨이 얼얼해지도록 패던 선생.

기성회비 안 냈다고 손바닥에 불이 나도록 때리던 선생.

미술 준비 못 해줘서.

기성회비 제때 못 줘서.

아들 딸들의 볼과 손바닥이 빨갛게 변하도록 맞고 온 것을 본

부모님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래도 그 시절은 선생님을 원망하는 부모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물론 그런 선생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제자의 소질을 일찍이 알아보고 잘 지도해서 지금은 우리나라의

몇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유명 화가로 이끌어준 정현숙 선생님.

이름 때문에 여자로 오해를 받았던 정 선생님은

진급을 하지 않고 평생을 평교사로 근무하셨고

퇴직 후에도 패러글라이딩을 하면서 멋지게 사신다.

동창회 할 때마다 꼭 불러 모셨던 정문상 선생님은

지금은 고향에서 문화해설사로 활동하신다.

자신이 직접 운동회 도구들을 만들던 2학년 담임 이정애 선생님.

진정한 애국을 가르쳐주신 노상진 선생님.

내 아버지와 군대생활을 같이 하셨다는 이유로 퇴근 전에 꼭 우리 집에 들러서

막걸리 한잔씩을 하고 가시던 이방환 선생님은 우리가 잘 못 했을 때는

혼쭐을 내셨지만 때린 적은 없어서 우리가 어른이 된 후에도 한번씩 찾아뵈었다.

이미 돌아가셔서 뵐 수가 없는 선생님들도 많다.

 

요즘 스승은 없고 교사만 남았다는 한탄이 여기저기 자주 나온다.

요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예전에도 그랬다.

단지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이 있었기 때문에

세상이 아직까지 잘 굴러가는 것이다.

그 많은 선생님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려나.

'살아 가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결혼  (0) 2022.04.25
피난 살이  (0) 2022.04.18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  (0) 2022.04.11
아침 단상  (0) 2022.04.08
고향의 봄  (0) 2022.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