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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

모래 알 만 한 진실이라도

by 머구리1 2022. 6. 28.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박완서-

 

이 책은 박완서 작가의 여러 가지 수필집 중에서 부분부분을 빼어서 만든 것이다.

수필집이니 별도의 감상은 남길 것이 없어서 좋아 보였던 구절만 몇 개 옮겨 놓는다.

다만 몇편 읽어 본 박완서 작가의 소설이 대부분 여자들이 주연이었던 이유를 이렇게 짐작해 본다.

그의 자녀는 14녀였지만 아들은 일찍 세상을 떠났단다.

그의 아버지도 작가가 세 살 때 맹장염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 당시의 의료 수준으로도 맹장염은 수술이 가능했었단다.

단지 봉건적인 할아버지의 방식으로 침과 한약으로 치료를 고집하다가 맹장이 터져서

복막염으로 사망을 했단다.

그러다보니 그의 어머니는 남편이 일찍 죽은 것은 시가집의 그런 봉건적이 분위기 때문이라고 무척 싫어했다고 한다.

어쩌면 작가의 인생에 남자들의 역할은 별로 없었고

무능력하거나 방관자적인 남자만 보였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수필집이어서 재미는 없겠구나 생각을 할 수도 있는데 소설같이 재미있다.

 

 

길은 사람의 다리가 낸 길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마음이 낸 길이기도 하다.

누군가 아주 친절한 사람들과 이 길을 공유하고 있고 소통하고 있다는 믿음 때문에

내가 그 길에서 느끼는 고독은 처절하지 않고 감미롭다.

  -친절한 사람과의 소통-

 

이세상 사람들이 다 나보다 착해 보이는 날이 있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고, 그런날은 살맛이 난다.

   -유쾌한 오해-

 

전형적인 보통 사람을 찾긴 힘들지만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를 보통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하고

또 그렇게 생각할 때 가장 마음이 편안한 것 같다.

그것은 아마 학교에서 가정환경 조사서를 써 오라고 할 때 생활 정도란에 거의 다 '중'을 쓰는 심리와도

비슷한 것이 아닐까.

   -보통 사람-

 

나는 손님을 가장 불편하게 하는 것은 지나친 공경과 관심이라고 생각한다.

너무 잘해주는 친척 집보다 불친절한 여관방을 차라리 편하게 여기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언덕방은 내방-

 

70년은 끔찍하게 긴 세월이다.

그러나 건져 올릴 수 있는 장면이 고작 반나절 동안에 대여섯 번도 더 연속 상영하고도

시간이 남아도는 분량밖에 안 되다니.

눈물이 날 것 같은 허망감을 시냇물 소리가 다독거려준다.

    -다 지나간다-

 

남의 좋은 점만 보는 것도 노력과 훈련에 의해서 얼마든 지 가능한 일이라고 단언할 수 있으니

누구나 한번 시험해보기 바랍니다.

남의 좋은 점만 보기 시작하면 자기에게도 이로운 것이, 그 좋은 점이 확대되어 그 사람이 정말

그렇게 좋은 사람으로 변해 간다는 사실입니다.

     -생각을 바꾸니-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불효 막심한 놈아"

이런 큰소리를 안 쳐도 억울하지 않을 만큼, 꼭 그만큼만 아이들을 위하고 사랑하리라는 게 내가 지키고자 하는 절도다.

부모의 보살핌이나 사랑이 결코 무게로 그들에게 느껴지지 않기를, 부모의 슬하가, 세상에서 가장 편하고

마음 놓이는 곳이기를 바랄 뿐이다.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교양있는 부모님들에 의해 잘 다스려지는 가정일수록 입김이 회박해지는 게 아쉽다.

세상이 아무리 달라져도 사랑이 없는 곳에 평화가 있다는 건 억지밖에 안 되리라.

숨결이 없는 곳에 생명이 있다면 억지인 것처럼.

     -사랑의 입김-

 

그보다 앞서 아버지가 급환으로 돌아가셨지만 세살적 일이어서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아버지의 급환은 전해지는 증세로 봐서 맹장염이 분명한데 벽촌이라 침 맞고 푸닥거리하다가

달구지로 읍내로 싣고 갔을 때는 이미 때가 늦어 허망하게 돌아가셨다고 한다.

맏며느리이자 서울 며느리인 어머니는 그게 철천지 한이 되어 자식만은 어떻게 하든 서울에서

공부를 시켜야겠다고 시부모님 허락도 없이 오빠를 데리고 서울로 가신 후였다.

촌살림을 주관해야 하는 종부로서 대단한 용기였지만 당시의 어른들로선 용서할 수 없이

괘침한 방자요 부덕이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어른들이 어머니를 헐뜯는 소리와 서울서 지지리 고생을 하다가  초라한

몰골로 돌아오길 바라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성차별을 주제로 한 자서전-

 

...그리고 남편을 떠나보낸 고통이 순하게 치유된 자신도 느꼈다.

시간이 나를 치유해준 것이다.

이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깨달은 소중한 체험이 있다면 그건 시간이 해결하지 못할 악운도 재앙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시간은 신이었을까-

 

오늘 살 줄만 알고 내일 죽을 줄 모르는 인간의 한계성이야말로 이 세상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만약 인간이 안 죽게 창조됐다고 가정하면 생명의 존엄성은 물론 인간으로 하여금 사는 보람을

느끼게 하는 모든 창조적인 노력도 있을 필요가 없게 된다.

자식을 창조할 필요도 없다면 사랑의 기쁨인들 있었으랴.

추(추함)가 없으면 미(아름다움)도 없듯이 슬픔이 있으니까 기쁨이 있듯이 죽음이 없다면

우리가 어찌 살았다 할 것인가.

때로는 나에게 죽음도 희망이 되는 것은 희망이 없이는 살아 있다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때로는 죽음도 희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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