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살아 가는 이야기

이정록 시인

by 머구리1 2022. 9. 8.

어제 저녁

고향 친구들의 단톡방에 한 친구가 올린 글이 있었다.

이정록 시인의 '참 빨랐지 그양반'이라는 시다.

시가 요즘 세태하고 맞지는 않지만 웃기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고, 슬픔뒤에 해학도 있는 듯하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시인인데 시가 참 좋아서 아침에 인터넷 서핑을 해 봤다.

1964년 생으로 여류 시인이란다.

인터넷에서 몇편의 시를 읽어 봤는데 시간 재미있다.

직접적이다.

이해를 하기 위해서 많은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조만간에 시인의 시집을 사지 싶다.

'참 빨랐지 그양반'

참 빨랐지!

그 양반!

 

신랑이라고 거드는 게 아녀

 

그 양반 빠른 거야

근동 사람이 다 알았지

 

면내에서

오토바이도 그중 먼저 샀고

달리기를 잘해서

군수한테 송아지도 탔으니까.

 

죽는 거까지

남보다 앞선 게 섭섭하지만

어쩔 거여

박복한 팔자 탓이지.

 

읍내 양지다방에서 맞선 보던 날

나는 사카린도 안 넣었는데

그 뜨건 커피를 단숨에 털어넣더라니까

 

그러더니 오토바이에 시동부터 걸더라고

번갯불에 도롱이 말릴 양반이었지

겨우 이름 석 자

물어 본 게 단데 말이여

 

그래서

저 남자가 날 퇴짜 놓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어서 타라는 거여

 

망설이고 있으니까

번쩍 안아서 태우더라고

뱃살이며 가슴이 출렁출렁하데

처녀 적에도 내가 좀 푸짐했거든

 

월산 뒷덜미로 몰고 가더니

밀밭에다 오토바이를 팽개치더라고

자갈길에 젖가슴이 치근대니까

피가 아랫도리로 쏠렸던가봐

치마가 훌러덩 뒤집혀 얼굴을 덮더라고

그 순간 수욱~

이게 이년의 운명이구나 싶었지.

 

부끄러워서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는데

정말 빠르더라고

외마디 비명 한 번에

끝장이 났다니까! 초조루증

 

꽃무늬 치마를 입은 게 다행이었지

풀물 핏물 찍어내며 훌쩍거리고 있으니까

먼 산에다 대고 그러는 거여

시집가려고 나온 거 아니였냐고.

 

눈물 닦고 훔쳐보니까

불한당 같은 불곰 한 마리가

밀 이삭만 씹고 있더라니까

 

내 인생을 통째로 넘어뜨린

그 어마어마한 역사가 한순간에 끝장나다니

하늘이 밀밭처럼 노랗더라니까

내 매무새가

 

꼭 누룩에 빠진 흰 쌀밥 같았지

 

얼마나 빨랐던지 그때까지도

오토바이 뒷바퀴가 하늘을 향해

따그르르 돌아가고 있더라니까

 

죽을 때까지

그 버릇 못 고치고 갔어

 

덕분에

그 양반 바람 한번 안 피웠어

가정용도 안 되는 걸 어디가서

상업적으로 써먹겠어.

 

정말 날랜 양반이었지...

'살아 가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추석  (2) 2022.09.11
추석 달  (2) 2022.09.10
내 동생은 부처다.  (8) 2022.09.07
벌초  (0) 2022.09.06
만 8년차 정기 검진  (2) 2022.0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