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
고향 친구들의 단톡방에 한 친구가 올린 글이 있었다.
이정록 시인의 '참 빨랐지 그양반'이라는 시다.
시가 요즘 세태하고 맞지는 않지만 웃기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고, 슬픔뒤에 해학도 있는 듯하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시인인데 시가 참 좋아서 아침에 인터넷 서핑을 해 봤다.
1964년 생으로 여류 시인이란다.
인터넷에서 몇편의 시를 읽어 봤는데 시간 재미있다.
직접적이다.
이해를 하기 위해서 많은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조만간에 시인의 시집을 사지 싶다.
'참 빨랐지 그양반'
참 빨랐지!
그 양반!
신랑이라고 거드는 게 아녀
그 양반 빠른 거야
근동 사람이 다 알았지
면내에서
오토바이도 그중 먼저 샀고
달리기를 잘해서
군수한테 송아지도 탔으니까.
죽는 거까지
남보다 앞선 게 섭섭하지만
어쩔 거여
박복한 팔자 탓이지.
읍내 양지다방에서 맞선 보던 날
나는 사카린도 안 넣었는데
그 뜨건 커피를 단숨에 털어넣더라니까
그러더니 오토바이에 시동부터 걸더라고
번갯불에 도롱이 말릴 양반이었지
겨우 이름 석 자
물어 본 게 단데 말이여
그래서
저 남자가 날 퇴짜 놓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어서 타라는 거여
망설이고 있으니까
번쩍 안아서 태우더라고
뱃살이며 가슴이 출렁출렁하데
처녀 적에도 내가 좀 푸짐했거든
월산 뒷덜미로 몰고 가더니
밀밭에다 오토바이를 팽개치더라고
자갈길에 젖가슴이 치근대니까
피가 아랫도리로 쏠렸던가봐
치마가 훌러덩 뒤집혀 얼굴을 덮더라고
그 순간 수욱~
이게 이년의 운명이구나 싶었지.
부끄러워서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는데
정말 빠르더라고
외마디 비명 한 번에
끝장이 났다니까! 초조루증
꽃무늬 치마를 입은 게 다행이었지
풀물 핏물 찍어내며 훌쩍거리고 있으니까
먼 산에다 대고 그러는 거여
시집가려고 나온 거 아니였냐고.
눈물 닦고 훔쳐보니까
불한당 같은 불곰 한 마리가
밀 이삭만 씹고 있더라니까
내 인생을 통째로 넘어뜨린
그 어마어마한 역사가 한순간에 끝장나다니
하늘이 밀밭처럼 노랗더라니까
내 매무새가
꼭 누룩에 빠진 흰 쌀밥 같았지
얼마나 빨랐던지 그때까지도
오토바이 뒷바퀴가 하늘을 향해
따그르르 돌아가고 있더라니까
죽을 때까지
그 버릇 못 고치고 갔어
덕분에
그 양반 바람 한번 안 피웠어
가정용도 안 되는 걸 어디가서
상업적으로 써먹겠어.
정말 날랜 양반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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