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끄적끄적

너는 그대로구나.

by 머구리1 2023. 10. 11.

아침 운동길에 고목이 된

느티나무가 보인다.

웃주막골 이라고 부르던 곳인데

이곳에서 멱도 감았고

어른들은 오가는 길 지게 쉼터로 삼았다.

추석이 와서인지 아침에는

나무 아래 그늘에서 쉬시던

부모님이 보였다.

너는 그대로구나.

60 년 전이나

그 전 60 년을 그랬듯이

넌 여전히 그대로구나.

네 앞마당을 파고

시멘트를 깔며 네 뿌리가 다쳐도

여름이면 왕매미에게

빈자리 하나 내주고

지나가는 온갖 새들에게

쉼터 내주는 너는 그대로구나.

네 앞 개울 넓힌다고

몇 날을 흐르는 물길 막고

포크레인 굉음을 울렸을텐데

넌 주름 한 줄 늘지 않았구나.

찬나무지 오가는 길

인생보다 무거웠을

내 아버지의 지게가

잠시 기댈 자리를 주고

함지에 새참 이고 가던

울 엄니 네 그늘에서 앉아

쉬던 한숨이 이제사 보인다.

천년을 살 것 처럼

아등바둥 사는 나를 보고

옹이 구멍으로 피식

실소 보냈겠지.

내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때부터 있어왔듯이

내 아들의 아들의 아들 때까지

그자리 잘 지켜서

훗날

가을 잎 떨어지는 날

나 닮은 녀석 찾아 오거든

바람에 밀린 듯

작은 가지 하나 흔들어 주라.

 

23.9.27​

'끄적끄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 녀석 참  (0) 2023.10.11
박용래 시전집  (1) 2023.10.11
푸틴을 죽이는 완벽한 방법-김진명  (2) 2023.09.25
유괴의 날  (0) 2023.09.17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0) 2023.0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