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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가는 이야기

시제 묘사

by 머구리1 2024. 1. 8.

바야흐로 시제의 계절이다.

시사 또는 묘사라고도 부르며 이곳에서는 세사라고 도 한다.

아마 시사의 사투리지 싶다.

지난주부터 도로변 산소에는 시제를 지낸다고

후손들이 줄줄이 모여있다.

 

사진은 인터넷에서 찾은 사진으로

한훤당 김굉필 선생 집안의 묘사 사진이다.

유교에서는 4대 봉제사라고 해서 고조까지는

집안에서 제사를 지내고

그 윗대인 5대 조 이상의 조상은 매년 산소를 찾아서

제사를 지내는데 이것을 묘사라 한다.

예전에는 산소에 직접 가서 제사를 모셨지만

지금은 제각이나 사당에서 지내거나 아니면

제일 위쪽 조상 산소에서 한 번에 지내고 만다.

부모 제사도 잘 안 지내는 세상에 그 윗대 조상까지

챙길 여력도 사람도 없다.

우리는 마천 백무동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가채라는 곳에서 지냈다.

물론 예전에는 그곳에서 지내고 그다음 주에

우리 마을에서 또 지냈다.

내가 34대 손인데, 마천에 있는 분이 27대 시고

오도재에 있는 분이 그분의 손자인 29대 시다.

저분들의 유전자가 내게 얼마나 묻어 있을지는

모르지만 조금이라도 묻어 있기는 할 것이다.

몇 년 전부터 시제에 참석하지 않는다.

윗대에서 자꾸 판을 키우려 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제각을 짓자고 마을마다 천만 원씩을 내란다.

우린 여력이 안 돼서 못한다고 했다.

우리 마을도 아닌 곳에 내가 갈 일은 전혀 없다.

다음 해에는 산소 보수를 해야 하니 또 사백만 원을 내란다.

그 뒤로는 참석하지 않았다.

참석하지 않으니 돈 내라는 얘기도 안 한다.

이 동네는 다들 고만고만하게 살다 보니 돈 걷기가 어렵다.

지난번에도 산소 보수하면서 돈을 걷었는데 힘들었다.

참석하지 않으니 편했는데 작년에 집으로 찾아왔었다.

진안에 사는 분들인데 집으로 찾아와서는 꼭 오란다.

알았다 해 놓고는 안 갔다.

내가 34대인에 그곳에 오는 사람 대부분 32대나 33대다.

그래서 불편하다.

어디 가든 인간 못된 게 촌수만 높은 사람은 있는 법이다.

내게 7대조 9대조 조상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리고 제사 문화가 생긴 것이 예전부터 있던 문화는 아니다.

조선시대에 와서 생긴 문화다.

그전에는 일반인들이 제사 안 지냈다.

초기 제사는 조상에 대한 효보다는 임금에 대한 충성식이었다.

조율이시 찾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대추는 씨가 하나니 임금을 뜻하고,

밤은 삼 정승

배는 육조판서

감은 팔도 관찰사를 뜻한다.

그래서 집안에서 관찰사가 많이 나온 집에서는

감을 배보다 앞에 놓기도 한다.

그런데 요즘은 씨 없는 감이 많은데 어쩌지?

그러니 조율이시 따지지 말고 그 철에 제일 맛있는 것

그리고 고인이 평소 좋아하셨던 것 올려도 문제 안 된다.

피자 햄버그도 제사상에 올라가는 세상이다.​​

 

우리 집 책꽂이에 모셔져 있는 경주배씨 족보다.

배가들은 분성, 달성, 흥해,김해,성산 외에도 몇 가지 본관이 더 있다.

원 뿌리는 하나지만 중간에 갈라진 본관들이다.

중시조인 배현경 할아버지 6세손들에서 갈라졌는데

이 또한 기록이 정확치 않다.

개중에는 자기들은 다른 배씨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약 삼십몇 년 전에 경주배씨로 통일을 해서 모았다.

우리 배가들은 시조가 두 분이다.

원시조는 신라를 세울 때 박 혁거세라는 알을 주워온

6부 촌장 중 한 분인 배 지타라는 분이고,

중시조는 왕건을 도와 고려를 세운 후 왕건으로부터

배씨 성을 하사받은 배 현경 할아버지다.

중시조인 배 현경 할아버지는 원래 배씨가 아니고

백옥삼으로 불렸는데 배씨로 바뀌었기 때문에 원시조의 후손이 아니다.

즉 원시조와 중시조의 피가 전혀 다른 것이다.

희한한 족보다.

그럼 저 족보는 맞을까?

불행히도 우리나라 족보 대부분은 엉터리다.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는 1476년에 만들어진 안동 권씨 족보다.

연산군의 아버이자 조선 9대 왕인 성종때다.

두 번째가 문화유씨의 가정보로 1565년에 만들어졌다.

임진왜란 일어나기 27 년 전인 명종 때다.

즉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가 조선시대에 만들어졌다는 얘기다.

그전에는 어떤 성씨이든 족보 없었다는 얘기다.

그럼 그전의 자료는?

그냥 끼워 맞췄겠지 뭐.

우리나라 족보의 90% 이상은 17 세기

이후에 만들어 졌다.

17 세기 이후라면 임진왜란 병자호란이

지나간 시기다.

사회가 혼란스러운 시기로 가짜족보

만들기 쉬웠다는 이야기다.

거기에 더해서 양반들은 병역을

면제 받았다.

혼란스러운 시기니 당연히 매관매직이

가능했다.

돈으로 양반 족보나 벼슬을 살 수

있었다는 얘기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사람들

병역 면제에는 목숨건다.

오죽하면 1920년대 일제 식민지 시절

제일 많이 출판된 책이 족보란다.

그럼 우리의 성씨는 정확할까?

아닐 가능성도 제법 높다.

고려 시대 까지만 해도 일반 평민들은 성이 없었디.

조선시대에 양반들이 족보를 만들면서 소나 개나

고동이나 게나 다 족보를 만들었다.

즉 어느 성씨인지도 모르던 사람들이 그냥 주인 성이나

좋아 보이는 성을 따서 성을 만들었다는 얘기다.

물론 돈주고 양반 성 산 사람들도 많다.

김해 김씨 집에서 머슴살던 사람은 김해 김씨가 됐고

안동 권씨 집에서 머슴살던 사람은 안동 권씨가 됐다.

너무 성씨에 대해서 자긍심 갖지 말자는 이야기다.

내 뿌리 아닐 수도 있다.

왕족의 후손이라고 자랑스러워

할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 왕족들의 근친혼은 유명하다.

동생이면서 매형이 되고

자기의 배다른 동생과 결혼한 왕들도 있다.

동생이 작은 아버지가 되기도 한다.

근친혼의 경우 부부의 성이 같아지니

왕비의 성을 바꿨다.

그래서 왕씨 공주가 황보씨 왕비가

되는 것이다.

왕족만 그랬을까?

명문가들 집 대부분 그랬다.

자매가 졸지에 동서가 돼서

서로 죽이고 또 죽였다.

족보고 성 씨고 무슨 상관인가.

그냥 형제간에 우애 있게 잘 지내고

부모님께 잘 하는 집이 양반집이다.

제사도 너무 목매지 말자.

조상 덕 많이 본 사람들은 제사 안 지내고

추석에 해외여행 간다고 공항으로 다 나가고

조상 덕 쥐뿔도 못 본 사람들끼리 명절에 모여서

홍동백서가 맞니 어동육서가 맞니 싸운다.

조율이시든 조율시이든 상관없다.

그것 조상님이 드실 것 아니고 우리 식구가

먹을 것이다.

 

23.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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