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살아 가는 이야기

오도재와 변강쇠 그리고 옹녀

by 머구리1 2020. 5. 15.

 어느 때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오도재라고 하면 변강쇠와 옹녀 이야기가 따라 나온다.

예전에는 전혀 모르던 이야기들이 어느 날 전설이 되어 나타나더라.

추측건대 마천조동을 잇는 관통도로가 생기면서부터 이 이야기가 나온 것 같다.

 

 오도재로 가는 진입로인 조동에서부터 옹녀와 변강쇠 안내판이 나오기 시작한다.

저멀리 지안재가 보인다.

 

 

 

 변강쇠 옹녀 묘 입구에 있는 안내판이다.

이곳은 펜션겸, 캠핑장, 카페를 겸하는 개인 사업장이다.

여기는 사실 오십년쯤 전에 이 위쪽 마을인 살구지에 살던 처남과 매형 사이에

살인사건이 일어났던 무서운 곳이어서 우린 잘 안가던 곳이다.

돌아가신 분은 노 포수라고 불리던 매형 되는 분으로 얼굴 기억이 안 나지만,

살인을 저지런 처남 되는 종수 형님이 참 좋은 분이셨는데 교도소 다녀오고 나서는 폐인이 되어있었다.

물론 지금은 돌아가셨다.

 

 

 옹녀와 상관없는 옹녀샘이란곳이다.

이곳 유리밭골이 물은 정말 좋다.

유리밭골만 아니라 이 아래 오른쪽 계곡인 여수밭골도 물이 아주 좋다.

한여름엔 이가 시리게 차고, 겨울에 물안개가 폈었다.

 

 

 

 

 남자와 여자를 같이 만든 조각상이다.

저 뒤쪽에서 보면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이 조각상도 만든 지가 그렇게 오래되진 않았다.

 

 

 

 옹녀묘라는 곳이다.

누가 만든 곳인지 비석까지 만들고 제법 오래 된 무덤처럼 허름하게 해서 진짜인 것처럼 잘 만들어놨다.

이 무덤의 진짜 주인은 누군지 궁금하다.

아니 주인인 없는 가짜 무덤일 수도 있다.

 

 

 

 거짓 무덤을 만들려면 형식이나 맞추던가.

남자와 여자의 위치가 바뀌었다.

 

 

 

오도재 아래쪽에 있는 여러 개의 남근상을 만든 변강쇠 공원이란다.

 

 

 

 지금 지안재와 오도재로 대표되는 지방도로가 생기기 전 이 길은 함양읍에서 마천으로 갈 수 있는

최단거리의 길이었다.

물론 차는 다닐 수가 없었고, 걸어서 맨몸으로 가거나 지게에 짐을 지고 갈 수 있을 정도의 좁은 길이다.

최단 거리라고는 하지만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길이 아니었고,

등구와 촉동에 사는 사람 정도만 한 달에 1번 정도도 겨우 다니던 길이었다.

지안재도 길을 내면서 많이 깎아내려서 그렇지 예전에는 경사가 아주 급한 오르막 길이었다.

지안재 먼당에 앉아서 함양에서 인월 간 국도를 지나다니던 차를 보면서 장에 가신

어머님을 기다리던 곳이기도 하다.

이 길이 있기 전엔 함양읍에서 마천으로 차를 타고 가기 위해서는 인월을 지나서 가거나,

휴천면을 둘러서 가는 아주 먼 길이었다.

그러다 보니 마천은 함양군이면서도 함양읍에서 아주 먼 다른 곳처럼 느껴졌었다.

 

 이 길 공사를 처음 시작한 게 내가 결혼하기 전인 1980년대 후반부터였다.

그렇게 중장비로 지안재 쪽과 등구 쪽만 밀어놓고 10여 년을 있다가, 포장까지 마친 것은

2002년 정도 되었을 때다.

이 길이 개통되기 전에는 사실 오도재나 내 고향 월평은 사람이 찾지 않는 깡촌중에 上깡촌이었다.

내 고향에 전기가 들어온 게 내 중학교 시절이니 대략 1975년쯤 되지 싶다.

그전에는 호롱불에 콧구멍 새카맣게 살았다.

 

이 길이 뚫리면서 뭔가 사람을 끌 이야깃거리가 필요했는지 변강쇠와 옹녀 이야기가 나오더니

어느 순간에 없던 무덤이 생기고 전설로 되어가기 시작했다.

옹녀 묘가 있는 곳은 유리밭골이라고 부르던 곳이고,

오도재 아래 마을이 있는 곳은 살구지 라고 부르던 고향 월평의 한 마을로 놋점과 함께

정부에서 독가촌을 지어주어서 몇가구가 살던 곳이다.

휴천면 월평리는

월평이라는 본 마을과 월평 저수지가 있는 사구실, 지리산 문학관이 있는 놋점. 오도재 아래 살구지

4개의 마을이 한 개의 리(里)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지금 오도재 제일 관문 왼쪽과 오른쪽으로 있는 법화산과 삼봉산까지 어렸을 적 아버지를 따라서

나무하러 다녔으니 옹녀 묘가 있는 유리밭 골은 가까운 축에 들었다.

지금 캠핑장과 카페가 있는 곳은 우리 논하고도 가까워서 자주 다녔다.

 

 난 이곳에서 태어났고 아직도 고향집에 한 달에 한 번꼴로 가는 예순의 나이지만

이 길이 나기 전까지는 내 고향마을에서 변강쇠와 옹녀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전혀 근거도 없을 법한 이야기가 어떤 이들의 영업전략인지는 모르겠으나 사실인 것 마냥 흘러 다니더니

갑자기 무덤까지 생겨서 의아하게 만든다.

 

결론은 오도재와 변강쇠 그리고 옹녀는 별 관계가 없다.

 

'살아 가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재난지원금과 물가  (0) 2020.06.01
병신력  (0) 2020.05.18
연휴의 고향길  (0) 2020.05.06
행복이란...  (0) 2020.04.29
21대 총선  (0) 2020.0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