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쯤
지금은 사과밭이 된 사진에 보이는 논 3,500평을 동생이 사던 날
고향집에 동생과 같이 아버님과 조촐한 축하의 술자리를 만들었다.
몇 잔의 술에 취기가 오르신 아버님이
"내가 평생동안 산 땅보다 네가 하루에 산 땅이 더 넓네.
참 내 삶이 허망하다"며 서글픈 눈물을 보이셨다.
자식이 큰 땅을 사서 기분이 좋으면서도
어쩌면 세상에서 제일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왔지만
경제적으로 항상 힘들었던 당신의 삶이 한탄스러웠는지 모르겠다.
일찍 조실부모 하시고
결혼 후에도 큰형님 밑에서 머슴살이를 하다가
맨몸으로 살림을 나셔서 자식 다섯을 키우면서
정말 부지런히 살아오셨지만
운명처럼 아버지의 어깨에 올라탄 가난이라는 놈은
떨어지지를 않았다.
그렇게 열심히 사셨지만 돌아가실 때까지 만든 재산은
작은 스레트집 한 채와 산골짜기 논 6 마지기가 전부였다.
그 스레트집도 동생과 내가 2년 전쯤인 97년도인가
마을에서는 처음으로 깨끗한 양옥으로 지어드렸었다.
그런 아버님이 하루 만에 자신보다 2배가 넘는 아들의 땅을
바라본 마음이 기분 좋으면서도 조금은 헛헛하셨던 것 같다.
더욱이 저 땅은 당신의 인생을 그렇게 힘들게 했던 큰집의 논이었다.
같이 술이 올랐던 나도
"그런 아들이 있는 것도 아버지 재산"이라고 하면서 같이 울먹였던 기억이다.
처음엔 다랭이 논이었던 저 땅도
동생이 장비로 모두 밀어서 두 다랭이로 만들어서 사과밭이 되었고
아버님도 몇년을 농사를 하시다가 가셨다.
저 사연많은 땅은 태풍매미로 인해 사과나무가 모두 뽑혀서
다시 대봉감나무를 심어서 몇년을 하다가
지금의 사과나무를 심은 것은 7년쯤 전이다.
그 뒤로도 동생은 땅에 맺힌게 많은지
옆에 보이는 땅 두다랭이 천평을 더 사서 벼농사를 지어서는
매년 남매들의 식량을 댄다.
작년에는 마을 옆에 야산 2만여 평을 사서는 개간 중이다.
지난주 토요일
딸내미 집에서 환갑이라고 독한 안동소주에 술기운이 올라서
돌아본 딸애의 집을 보니 아버지 생각이 나고
나 또한 울컥하더라.
내 아버님처럼 내가 평생을 살아서 만든 집보다
어느 날 갑자기 산 딸의 집이 더 크고 더 좋다.
술기운 때문이었겠지만 조금은 허전한 맘도 들었다.
이십여 년 전쯤
내 아버님의 마음이 이랬을까?
2년 전에 딸은 2년마다 이사 다니고 계약서 작성하고 하는 게 힘들다고 집을 샀다.
새집이니 내집보다 당연히 더 좋다.
아버님처럼 나 또한 돈 버는 재주는 없어서
창원에 처음 오면서 산 집에서 아직도 그대로 살다 보니
집값이나 모든 게 남들만 못하다.
이제야 돈 욕심 내봐야 사람만 추해지고
노년에 자식이나 남한테 민폐 안 끼칠 만큼이야 준비해 놨다지만
가끔은 아쉬울 때도 있다.
어제저녁
김여사와 이제 재미있게만 살자고 얘기했다.
이제 와서 무슨 욕심을 낼 것이고
욕심을 낸다고 이루어질 것도 아닌데
그냥 부부가 서로 쳐다보면서 웃으면서 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