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이 서른세 번째 결혼기념일이었다.
기념일을 자식들이 챙기고부터는 나 스스로 많이 소원해진 것 같다.
그전에는 제법 이벤트도 하고 했는데 이삼 년 전부터는
기념일들을 자식들이 챙기기 시작하니 나는 덜 챙기게 된다.
이번에는 막내가 이것저것 제법 준비를 했다.
부스터 샷 맞은 아빠 술 못 먹는다고 무 알코올 샴페인까지 준비를 하고
제법 돈을 줬음직한 한우 선물세트까지 준비해서 맛있게 먹었다.
우리나라에서 올림픽이 열리던 88년도 연말
부산에서 미팅을 하자고 준비해 놓았던 친구들의 원망을 들으며
내 나이 스물여덟이던 해
크리스마스날인 12월 25일에 결혼식을 올렸다.
김여사 처음 얼굴 본 지 28일 만이었고
네 번째 만남이 결혼식장에서였다.
연분이라는 게 있는 모양이다.
난 처음 만남에 첫인상 하나만 보고 결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장남과 결혼 안 할 것이라고 선을 다섯번이나 보면서
그렇게 튕겼던 김여사는
결국 장남인 나와 결혼을 했다.
그리고 이제껏 제대로 된(?) 부부싸움 한번 없이
33년간 딸 둘 아들 하나 낳아서 잘 살고 있다.
첫 만남에 눈이 덮인 나는 결혼 날짜 잡을 때까지
처부모님이 안 계신 줄도 몰랐다.
사실 처음에 만나서 결혼을 결심한 것은 아니다.
처음에 만났을 때는 정말 예쁘다는 생각만 있었고
나하고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었다.
대략 포기하고 있을 때
소개를 시킨 동생에게서 전화가 와서는
"오빠 마음에 있으면 서둘러라.
주변에서 자꾸 중매가 들어온다"라는 전화가 왔고
그 주 주말에 회사에 연차 열개를 써놓고 두 번째 만남을 나갔었다.
안되면 집 앞에서 농성이라도 할 기세로.
그 당시 울산 방어진에서 진주는 꽤 먼 거리였다.
차도 없던 시절이니 버스를 최소한 세 번에서 네 번을 갈아타야 했다.
두 번째 만남에서 결혼을 하자고 했고
김여사는 큰오빠가 보잔다고 했는데
다행히도(?) 그날 큰오빠가 산에 갔다가 일이 생겨서 못 왔다.
아마 그날 큰오빠를 만났다면 결혼을 못했을 것이다.
그때 내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지금보다 몸무게가 20kg 정도 적게 나가서 바람 불면
날아갈 몸매였다.
얼굴 큰 사람이 살이 너무 없으면 참 초라하게 보인다.
그다음 주 가족들 얼굴이나 보자고 한 자리에
뭐가 급했는지 내 어머니께서는 결혼 날을 잡아 오셨다.
그것도 2주 뒤인 크리스마스에...
황당해하는 처가 식구들이 있었지만
김여사의 마음도 어느 정도는 있었는지
일사천리로 흘러서 결혼식까지 하게 돼서
딸 귀한 집안 외동딸을 데려다 한 칸짜리 전세방에서
신혼살림을 차렸었다.
그리고 삼십여 년.
결혼하기 전부터 시작된 노사분규로
제대로 된 월급도 갖다 주지 못했고
그 후로도 매년 되풀이되어 연례행사가 되어버린 노사분규.
참 그 시절 울산의 노사분규는 심했다.
그 와중에 애들은 셋이나 태어났고
95년도에는 창원으로 옮겼다.
창원에 와서는 제법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노동조합이 없는 그룹이었으니 노사 분규가 없었고
신규 사업을 하다 보니 매번 바빴다.
삶의 여유도 제법 생겼다.
이제 인생시계가 저녁 6시를 넘어선다.
남은 시간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껏 잘 살아왔듯이
남은 시간도 둘이서 알콩달콩 살고 싶다.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지도 않고
그냥 조용히 재미있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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