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번째 책은 법정스님의 '아름다운 마무리'다.
법정스님의 글이야 워낙 유명하니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고
'무소유' 내용이 정말 와 닿아서 서너 번은 읽은 것 같다.
건성으로 읽은 건지 그렇게 마음에 와 닿던 글들 중 기억하는 내용은 또 별로 없다.
뇌세포가 많이 죽었나 보다.
'아름다운 마무리'도 예전에 한번 읽은 책이긴 하다.
읽고 책장에 두었는데 내용은 사실 기억이 없다.
이번에 책을 정리하면서 다시 읽게 되었다.
2008년에 초판을 발행한 책이니 벌써 12년이나 된 것 같다.
나중을 위해서 좋았던 구절들을 남긴다.
-. 노년의 아름다움이란 모든 일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남에게 양보할 수 있는 너그러움에 있다.
-. 아름다운 마무리는
* 삶에 대해 감사하게 여기는 것.
*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
* 나는 누구인가'하고 묻는 것.
* 내려 놓은 것.
* 비움.
* 삶의 본질인 놀이를 회복하는 것.
* 지금이 바로 그때임을 아는 것.
* 용서이고, 이해이고 자비이다.
* 자연과 대지, 태양과강. 나무와 풀을 돌아보고 내 안의 자연을 찾는 것.
* 개체인 나를 뛰어넘어 전체를 만나는 것.
* 차 한잔을 앞에 두고 그 향기와 맛과 빛깔을 조용히 음미하는 것.
* 단순해 지는 것.
* 살아온 날들에 대해 찬사를 보내는 것.
* 언제든 떠날 채비를 갖추는 것.
* 그러므로 아름다운 마무리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이책에 대한 요약된 해석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실천은 어렵다.
-. 행복할 때는 행복에 매달리지 말라.
불행할 때는 피하려 하지 말고 그냥 받아들이라.
그러면서 자신의 삶을 순간순간 지켜보라.
맑은 정신으로 지켜보라.
매번 다짐하지만 잘 안 되는 생각들이다.
흘러가는 인생에 거부하지 말고 스스로의 삶을 살기가 쉽진 않다.
-. 때가 되면, 삶의 종점인 섣달 그믐날이 되면, 누구나 자신이 지녔던 것을 모두 놓아두고 가게 마련이다.
우리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나그네이기 때문이다.
미리부터 이런 연습을 해 두면 떠나는 길이 훨씬 홀가분할 것이다.
반드시 해야할 공부다.
비움에 대한 공부는 누구나 해야 하지만 이것 또한 쉽지는 않다.
가족 자식들에 대한 애착이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번민도 있기 때문이다.
-. 아니지요. 당신들은 앉아 있을 때는 서있고,
서 있을 때는 걷고 있고,
걷고 있을 때는 벌써 목적지에 가 있지요.
'과속하지 않기'라는 페이지에 있는 내용인데
사람들이 대부분 걱정을 사서 하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 아닐까 한다.
-.누구나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면 그런 소원을 이룰 수 있어야 한다.
한 인간으로서 가정적인 의무나 사회적인 역할을 할 만큼 다 했으면 이제는 자기 자신을 위해
남은 세월을 활용할 줄도 알아야 한다.
어차피 인간사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홀로 남게 마련이다.
이 세상에 올때도 홀로 왔듯이 언젠가는 혼자서 먼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엄연한 삶의 길이고 덧없는 인생사다.
어쩌먄 지금의 나한테 하는 소리 같기도 하다.
가장으로서의 역할은 다 했으니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을 만드는 것.
홀로 설 준비를 하는 것.
그리고 남은 인생을 즐기는 것.
그리고 자식들 걱정에 스트레스 받지 않는 것.
-. 우리가 적은 것을 바라면 적은 것으로 행복할 수 있다.
그러니 남들이 가진 것을 다 가지려고 하면 우리 인생이 비참해진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몫이 있다.
자신의 그릇만큼 채운다.
그리고 그 그릇에 차면 넘친다.
자신의 처지와 분수 안에서 만족할 줄 안다면 그는 진정한 부자다.
진정한 부자란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는 것이라는데 그런 이 가 얼마나 될까?
수도자가 아닌 이상 쉽지 않겠지만 노력이라도 한다면
이것또한 수도의 한 방법일 터.
-. 운문사 비로전 부처-오랫동안 가부좌로 앉아계시니 다리가 저려서 슬그머니 바른쪽 다리를
풀어놓는 모습이 너무 인간적이어서 인자한 시골 할아버지 같다.
운문사를 두세 번 가 봤지만 보지 못한 그림이다.
역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같은 그림도 다르게 보인다.
책을 읽으면서 인터넷에 검색해 본 것들이다.
비로전 부처, 개망초, 마가목, 회나무
-. 죽음도 미리 배워 두어야 한다.
-. 살아있는 모든 것은 때가 되면 그 생을 마감한다.
이것은 그 누구도 어길 수 없는 생명의 질서이며 삶의 신비이다.
만약 삶에 죽음이 없다면 삶은 그 의미를 잃게 될 것이다.
죽음이 삶을 받쳐주기 때문이 그 삶이 빛날 수 있다.
-. 이미 사그라지는 잿불 같은 목숨인데 약물을 주사하거나 산소호흡기를 들이대어 연명의술에
의존하는 것은 당사자에게는 커다란 고통이 될 것이다.
한평생 험난한 길을 헤쳐 오면서 지칠 대로 지쳐 이제는 푹 쉬고 싶을 때, 흔들어 깨워
이물질을 주입하면서 쉴 수 없도록 한다면 그것은 결코 효가 아닐 것이다.
현대 의술로 소생이 불 가능한 경우라면 조용히
한 생애의 막을 내리도록 거들고 지켜보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일찍부터 삶을 배우듯이 죽음도 미리 배워 두어야 할 것이다.
언젠가는 우리들 자신이 맞이해야 할 엄숙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나 또한 공감하는 이것 때문에 아내와 같이 50대의 마지막 날
사전 연명치료 의향서를 제출했다.
인간답게 죽고싶은 내 마음을 미리 등록했고
자식들에게도 이야기했다.
인위적으로 나를 살리지 말라고 했다.
죽을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추하지 않게 죽고 싶기 때문이다.
최소한 내 죽음의 방법은 내가 결정하고 싶었다.
책을 읽으면서 숙연해지기도 하고
이렇게 살고 싶다는 소원을 하기도 하고
스님의 삶이 부럽기도 하면서
나의 반골 기질 때문인지 또 반대의 생각도 조금은 들었다.
물론 법정스님을 좋아하고 존경하면서도 말이다.
세상 모든이가 이렇게 욕심 없이 산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됐을까?
과연 스님이 생각하는 좋은 세상이 됐을까?
모든 이들이 욕심없이 독야청청으로 살았다면
원시적인 삶을 벗어나지 못하고
전 인류가 빈곤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살고 있지는 않았을까?
아마 모르긴 해도 지금처럼 풍요롭게는 살지 못했으리라.
어쩌면 세상은
욕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
끊임없이 더 많은 부를 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발전되어 왔다.
그들 때문에 수도자들이 맘 편하게 수도자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만일 우리나라 사람들만이 스님이 생각하는 삶을 살고
다른 나라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면 벌써 남의 나라에 먹혀서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도 못 사는 인생들이 되지 않았을까?
종교인들이 일하지 않으면서도(경제적인 활동)
맘 편하게 그들의 신을 모시고
그들이 원하는 삶을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것은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욕심많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밥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꼭 나쁜 사람들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울러 요즘들어 스님의 부재가 많이 아쉽다.
스님이기를 포기하고
광장에서 내 주머니 채워주라고
악다구니를 부리고 있는
조계종 중놈들을 보면서
무소유를 이야기 하시던
스님의 일갈이 보고싶다.
성철스님이나 법정스님이
요즘의 조계종 중놈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아직 읽을 책이 제법 남았는데
둘째가 또 세권의 책을 보내왔다.
다음 책은 예전에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는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이다.
20대의 동물농장과 60대에 보는 동물농장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